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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을 그 길목에서 (02)

[월간 꿈CUM] 평신도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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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꿈CUM


30년 지난 편지들을 보물단지처럼 붙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그리고 훗날에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보내야 하지 않는가? 낙엽처럼 말이다.

드디어 얼마 전에 장롱에서 편지 상자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무작정 차 트렁크에 실었다. 큼지막한 장바구니에 쏟아 담았는데도 비집고 나오는 것이 1~2백 통을 되어 보였다. 기회를 만들어 과감하게 태우자고 마음을 다잡아먹고 별렀더니, 때가 왔다. 산 밑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시는 은퇴 신부님을 찾아뵙는 날이었다. 마당을 살폈더니 커다란 알루미늄 솥단지를 걸어 놓은 아궁이가 있었다. 신부님께 허락을 받고는 불을 지피고 편지를 밀어 넣기 시작하자 허망하여 와락 뭉클했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한 것도 놓아야 하는 인생의 가을에 서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길 속으로 편지들을 밀어 넣던 나는 한순간 봉투 하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딱 한 통만 읽어 보고 싶었다. 결혼반지 이야기였다. 남편과 결혼한 지 넉달만에 시누이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장롱을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오빠가 경제적 능력이 없었으므로, 나는 남편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결혼 반지를 팔아 장롱 값이라며 보냈다. 훗날 생각하니 결코 착한 마음이 아니라 철없고, 얕고, 신중하지 못한 참으로 부끄러운 나의 행동이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반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남편이 중동에 근무하면서 첫 선물로 휴가를 나온 직원 편에 진주 반지를 보내온 것에 대한 답장이었다.

‘보내준 반지는 손가락 마디가 굵어져서 새끼 손가락에나 맞는다. 결혼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보석은 원하지 않으니 특히 직원 편에 그런 것을 다시는 보내지 말아 달라’는 내용. 그리고 ‘고달픈 시집살이는 신앙으로 잘 버티며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가슴이 싸아했다. 밤새도록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많은 편지를 읽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눌렀다. 백여 통이 넘는 편지의 사연마다 들추어 어쩌겠다는 건가? 다 지나가버린 시간의 아픔과 기쁨도, 잘못과 부끄러움도 설령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내 작은 인생의 나무에서 낙엽이 되어 태워져야만 한다. 그리고 태워진 시간의 낙엽은 다시 제2의 ‘내 인생의 작은 나무’에 새로운 거름이 되아야만 한다.

오늘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레미 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의 시, ‘낙엽’을 읊조리고 싶다. 

글 _ 곽외심 (글라라, 수원교구 분당성요한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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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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