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기 때문에 인간 생명은 그 수태에서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가톨릭 교회는 낙태를 비롯해 자살 안락사 등을 생명을 거스르는 중대한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한 고등법원이 43세의 전신마비 여성에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을 두고 바티칸의 윤리신학자들과 잉글랜드-웨일즈 주교회의가 상반된 의견을 보이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미스 B’라고 알려진 이 여성은 지난해 초 척추내 혈관이 터지면서 목 아래 부분이 완전히 마비돼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수술을 받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병원 측에 산소호흡기를 떼 달라고 요구했다. 병원 측은 그녀의 소생 가능성이 1 정도라고 보면서 윤리적인 문제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 여성은 산소호흡기를 떼게 해 달라고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으며 고등법원은 지난 3월22일 그녀에게는 “고통을 줄이고 평화롭고 위엄있게 삶을 마감하도록 허용해 달라”는 자신의 뜻에 부합하게 처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바티칸의 저명한 윤리신학자인 지노 콘체티 신부는 교황청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3월24일자에서 치유자인 의사들의 역할을 무시하고 의사들을 사형 집행인으로 별질시키는 것이라며 이번 판결을 비난했다.
교황청 생명학술원의 부원장 엘리오 스그레치아 주교도 ‘미스 B’에게서 산소호흡기를 때는 것은 “진짜 안락사 행위”라고 지적했다. 스그레치아 주교는 3월23일 바티칸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의사들은 산소호흡기를 떼는 대신에 발전된 의학 기술들을 활용해 환자들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통을 더 잘 견디어 나가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비용을 줄이고 고통을 겪는 환자를 간호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을 피하고자 하는 갈망이 안락사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웨일즈 주교회의는 영국 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이 단지 환자에게 부담스러운 생명 연장 치료를 거절할 법적이고 도덕적인 권리가 있음을 확인한 것뿐이라면서 이를 안락사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주교회의는 성명에서 “이번 경우는 안락사나 보조 살인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없으며 이런 문제들에 대한 선례를 만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 영국의 안락사 반대 단체인 ‘의학 윤리 동맹’도 주교회의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의학 윤리 동맹의 대표인 앤서니 코울 박사는 이번 판결이 죽을 권리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어떠한가
지난 1992년에 발표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동기나 수단이 어떻든 직접적인 안락사는 신체장애인 병자 또는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이라면서 “안락사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교리서는 “따라서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죽게 하는 행위나 그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그의 창조주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게 대한 존중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2277항).
교리서는 그러나 “비용이 크게 들고 위험하며 특수하거나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 기구의 사용 중단은 정당할 수 있다”며 “그런 경우는 ‘지나친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교리서는 이 경우는 “(환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환자가 자격과 능력을 가졌을 경우에는 환자 본인이 (중단)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법적 보호자들이 결정해야 하는데 항상 환자의 타당한 소원과 정당한 이익을 존중하는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2278항).
교리서는 또한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환자에게 일반적으로 베풀어야 하는 치료 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합당하지가 않다”고 덧붙이고 있다(2279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