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당시 미 육군의 종군신부로 활동하다 북한의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숨진 에밀 카폰(Emil Ka
aun 1916∼1951) 신부의 시성추진 운동이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일고 있다.
카폰 신부의 시성추진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세인트루이스 대교구의 패트릭 몰리 몬시뇰. 카폰 신부의 신학교 동창인 몰리 몬시뇰은 미국 군종대교구와 카폰 신부의 출신지인 캔자스 주 위치타 교구와 함께 추진운동을 펴면서 카폰 신부의 전구를 통한 기적 사례 수집에도 나서고 있다.
몰리 몬시뇰이 한국 전쟁 당시 카폰 신부의 영웅적인 삶에 대해 처음으로 들은 것은 지난 1957년 위치타에서 카폰 신부를 기억하여 그의 이름을 딴 한 고등학교를 바치는 행사에 참석했을 때였다. 카폰 신부와 함께 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행사장에서 한결같이 카폰 신부가 한 일에 대해 대단한 존경을 표시했었다고 몰리 몬시뇰은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다가 몬시뇰은 최근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카폰 신부의 생활을 기록한 한 군종회보를 읽고서는 카폰 신부에 대해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몬시뇰이 수집한 증언들에 따르면 카폰 신부는 수용소 포로들이 이질로 고생하자 습격대를 조직하거나 때로는 혼자 몸으로 배급소에 몰래 들어가 필요한 음식이나 물품들을 구해주곤 했다. 자신에게 먹을 것이 돌아올 때도 다른 포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들을 화장실로 부축해 용변을 보도록 도와주었으며 더러워진 옷가지들도 깨끗이 빨아주는 등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뿐 아니라 카폰 신부는 절망에 빠져 있던 포로들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준 화신이었다. 한번은 개신교 군목이 좌절에 빠져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동료 포로들의 눈에 띄었다. 포로들은 그 목사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실패했고 결국에는 카폰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폰 신부는 “너희 개신교인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야!”라는 한마디 말로 목사에게 삶의 의욕을 다시 불러 일으켜 주기도 했다.
이렇게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많은 포로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카폰 신부는 그러나 평북 벽동의 포로수용소 생활 몇 달 만에 불치의 병에 걸려 1951년 5월23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도 벽동 포로수용소에는 활기가 넘쳤다. 수용소 사람들은 카폰 신부를 통해서 서로 도와가며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카폰 신부가 있었던 벽동 포로수용소의 생존자는 수는 다른 포로 수용소보다 7배나 많았다고 한다.
한편 카폰 신부의 생애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가 1956년 신학생 시절에 「종군 신부 카폰」(가톨릭출판사)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정 대주교는 1991년 개정판 역자 후기를 통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스스로 종군을 지원하여 전선에 나와 불꽃 튀는 전투 중에 포로가 된 카폰 신부는 “얼마든지 도망할 수도 있었지만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기 위하여 일부로 포로가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정 대주교는 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직 전우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쏟음으로써 그는 ‘가시 철사를 쓴 그리스도’라는 숭고한 자화상을 형성했다”고 밝혔다. 【세인트루이스 미국=CNS】
카폰 신부 약력
▲1916년 4월20일 미국 캔자스 주 필센에서 출생 ▲1940년 사제 수품 ▲1944∼1946 1차 군종 신부 역임 ▲1946∼1948 워싱턴 D.C. 가톨릭대학에서 교육학 전공 ▲1948년 9월 군에 재입대 ▲1950년 7월11일 한국 전장에 종군 ▲1950년 9월2일 동성훈장 받음 ▲1950년 11월2일 중공군 포로가 됨 ▲1951년 5월23일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