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와 교황 비오 9세(1846∼1878)의 3일 시복식을 앞두고 두 교황에 대한 로마의 분위기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티칸 근처의 종교물품 상점들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 교회 개혁을 촉발시킨 요한 23세의 상본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서점가의 진열대에는 그에 관한 책과 비디오들로 가득 차 있다. 2개 텔레비전 방송사도 요한 23세의 특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있는 요한 23세의 무덤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참배객이 약 40명이나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또 1963년 이후 참배객들이 바친 꽃들이 가득 쌓여 있다.
이에 비해 비오 9세에 대한 분위기는 딴 판이다. 베드로 사도 이후 가장 오랜 기간(32년) 교황직을 수행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70)를 소집한 교황이지만 상점에서 비오 9세에 관한 상본이나 책자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성 라우렌시오 대성당에 있는 비오 9세의 무덤은 입구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고 관리인들은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두 교황에 대한 반응이 이렇듯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 쇄신의 등불 역할을 했지만 교황 비오 9세는 교회의 근대화에 저항한 인물로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선포한 비오 9세를 세속 권력에 대해 교황의 영향력을 내세운 19세기의 마지막 왕-교황 으로 알고 있는 반면 요한 23세는 20세기 교황 가운데에서 가장 인간적인 교황으로 기억하고 있다.
요한 23세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평화를 강력히 촉구했고 타임 지는 그해 말 요한 23세를 올해의 인물 로 선정하면서 그의 “온화함과 단순함 그리고 매력”이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전세계의 비가톨릭인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요한 23세는 또 5년도 채 안되는 재위 기간에 로마의 교도소와 고아원 성당과 학교 등을 140차례 이상 방문 바티칸 시국의 담을 넘은 최초의 교황으로 기억됐다. 어머니요 스승 지상의 평화 같은 사회 회칙을 발표 사회 발전과 정의 평화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제시했다.
교황 요한 23세가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도중에 선종했을 때 일부에서는 만장 일치의 환호로서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교황청의 신중한 태도로 무산됐다.
교황 비오 9세의 경우 일반인들의 반응은 냉담하지만 교황 요한 23세가 비오 9세를 성덕이 뛰어난 교황으로 높이 평가해 그의 시복시성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실제로 요한 23세는 1961년 한 일반알현에서 비오 9세의 시성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렇게 대조적인 두 교황을 시복함으로써 두 교황이 각각 소집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고자 한다고 평하고 있다. 【바티칸시티=C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