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과 중국 가톨릭은 "뿌리가 닿아있다"고 할 정도로 관계가 밀접하다.
우리는 18세기 후반 중국교회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곳이 베이징 북당(北堂)이다. 앵베르 주교, 베르뇌 주교 등 이 땅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파리외방전교회 성인들도 본래 중국에서 10년 이상 선교했던 `중국통`이다.
1949년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보편교회와 멀어진 중국교회.
바티칸과 중국의 외교관계가 복원되면 중국교회는 다시 보편교회와 어깨동무를 하고 하느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아울러 중국은 제삼천년기 아시아 복음화 시대의 중심무대가 될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5일 "중국은 복음에 문을 열어야 한다"는 직접적 표현으로 모종의 메시지를 던졌다.
바티칸과 중국 수교설은 오래전부터 외교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시아 복음화 시대의 주역으로 나서야 할 한국교회로서는 복음의 문이 열리는 그 날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중국교회를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취지로 중국교회의 역사와 현황을 살펴보는 `니하오! 중국교회`를 연재한다. `니하오 `는 "안녕하세요"라는 중국 인사말이다.
#왕조 보호로 200년간 번창한 경교
중국에 정통 가톨릭이 전해진 때는 16세기 명나라 말기다.
예수회 소속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광동(廣東) 근처 상천도에 상륙해 내륙 진출을 모색하다 병사했다. 이로부터 30년 후 마태오 리치 신부가 마카오→광동→남경을 거쳐 1601년 북경에 도착하면서 본격적 선교가 시작됐다.
그러나 7세기 당 태종 시대에 전래된 경교(景敎)를 알아야 중국선교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경교는 에페소공의회(431년)에서 이단으로 단죄돼 추방된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us) 선교사들이 한때 중앙아시아와 중국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리스도교 분파다. 로마 제국을 뜻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 경교`라고도 불렸다.
635년 태종 정관(貞觀) 9년에 시리아 출신 수도자 알로펜을 단장으로 하는 21명의 선교사 일행이 수도 장안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했다. 알로펜을 궁중으로 불러 강론을 들어 본 태종은 "도리가 옳고 정치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경교 보호정책을 폈다.
경교는 주일미사, 고해성사, 세례 및 영성체 등 가톨릭과 유사한 면이 많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결합(hypostatic union)이 아니라 외형적 결합(synapheia)이라고 주장했다. 또 아라비아,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래되는 동안 마니교, 이슬람교, 불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200여 년간 번창했던 경교는 당나라 말기 무종(840~846년) 때 박해를 받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국고가 텅 비자 경교는 물론 불교ㆍ마니교ㆍ요교 등 외래종교를 박해하고 사원 재산을 몰수한 것이다. 수도자들은 강제 환속하고, 남은 신자들은 중앙아시아로 피신하거나 불교 또는 도교로 개종했다.
#16세기에 경교 흔적 발견
경교는 황제 보호에 너무 의지하고, 한족을 흡수하지 못한 채 `비경비불(非景非佛), 사경사불(似景似佛)` 즉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14세기 말 소멸됐다.
원 제국시대(1279~1368)에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북경에 도착해 교회를 세웠으나 원 제국이 멸망하면서 선교활동도 중단됐다.
16세기 후반 중국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미사 때 사용하는 제령(祭鈴)을 골동품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는가 하면 의미도 모른 채 십자성호를 긋는 중국인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경교 흔적이라고 추정된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