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발언)
- "누구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참사 기억해달라"
-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 집 인근 성당 다 다녀"
- "길 가다가 성당 나오면 초 켜놓는 생활 오래 해"
- "핼러윈 잘못된 거 아냐…어른들의 관리 체계 잘못"
- "왜 경찰 인력 배치 안 했을까...하던 일을 왜 안 했을까"
- "지금의 국가 너무 잔인해...조사 당연히 이뤄져야"
- "정부 태도 해괴해…우리 아이들 범죄자 취급"
- "유가족들, 정신적으로 몸 적으로 피폐해지고 쑥대밭"
- "우리는 정치를 모릅니다…희생자의 부모일 뿐"
- "尹, 대통령·정치인 다 참석해야 하는 거 아닌가"
- "尹, 정치적 핑계로 불참? 자리 남겨놓고 기다릴 것"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그리고 두 건물사이에 난 좁다란 길. 누군가에게는 스쳐지나갈 평범한 골목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길이 10월 29일의 아픈 기억을 여는 문이기도 합니다. 원하지도 않았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데 유가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던 이분들의 1년. 그 시간 어떤 마음으로 버티셨을지 저희도 마음을 보태보려고 합니다. 저희가 준비한 음성 듣고 얘기 이어가겠습니다.
‘5.18부상자 유족 되시는 분의 인터뷰를 몇 년 전에 본 적 있어요. 아프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달력을 보면 5월이래요. 그분은 5월을 앓고 있다면 저는 10월을 앓고 있는 것 같아요.’
▷10월을 앓고 있다. 이태원참사 유가족 중의 한 분의 목소리였는데 이 자리에 같은 마음으로 앉아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세 분 나와 주셨는데 각자 자기소개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연주 아빠 유형우입니다.
▶최민석 라파엘 엄마 김희정 안젤라입니다.
▶신애진 가브리엘라 엄마 김남희 테레사입니다.
▷오늘 어려운 자리 세 분 함께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모레가 1주기입니다. 먼저 1년 전 세 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어떤 하루이셨는지 아이에 대해서 어떤 기억 갖고 계신지 나눠볼게요.
▶고 유연주 아버지: 1년 전 오늘이죠. 28일이었으니까 내일이네요. 그날은 평범하고 날씨가 굉장히 그해 10월은 굉장히 좋았어요. 행복한 그런 가족들이 다 모여서 저녁을 보냈었고 그날 연주하고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연주는 친구들 만나러 가기도 하고 저는 와이프하고 시청 쪽 광화문 쪽에 산보를 나갔었거든요. 집에 돌아왔을 때 뉴스 자막을 보고 이게 무슨 일인지. 연주가 이태원에 갔는데. 제발 우리 연주는 아니겠지. 그 뒤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저희 딸아이나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집에 있는지 먼저 확인하고 모두 자기 자식들한테 전화를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아이는 아니겠지. 12시경에 걸려온 병원 전화에 제발 주님께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울부짖었습니다. 막상 이런 참사를 겪고 보니까 이게 제가 너무 안일했구나. 누구한테라도 일어날 수 있었던 상황인데 이런 마음을 우리 국민들이 다 알고 있어야 하고 나뿐만 아니라 나한테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를 항상 기억하고 참사를 기억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고 신애진 어머니: 10월 29일이 아침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이라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고요. 그리고 만약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이 있다면 그날 아침으로 되돌리고 싶어요. 작년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 최민석 어머니: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보통 때 같으면 민석이가 늦잠을 자고 있을 토요일이었는데요. 그 주는 다른 일이 바빠서 올 수 없다고 통화를 목요일에 했었고 저는 민석이한테 전화해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제 일이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까 토요일, 일요일 없이 항상 일을 하거든요. 보통 10시부터 해서 저녁 10시가 마지막인데 10시가 마지막이면 12시에 끝나잖아요. 그날은 그 주는 할 일이 많았던 주예요. 민석이 오면 하룻밤 잤으니까 예방접종도 해야 하고 저희는 항상 3명이 같이 예방접종을 한꺼번에 같은 날 하거든요. 그리고 겨울준비로 따뜻한 내의도 사려고 했었고 민석이 동생은 군대에 가게 되면 오빠를 못 보니까 가족사진도 찍고 싶어 했던 주입니다. 그래서 할 일도 많고 민석이가 분가를 했었기 때문에 먹는 게 변변치 못할 것 같아서 외식도 고기 좀 사서 먹이고 해야겠다고 했던 날이었는데 그날도 10시가 넘어서 끝났어요. 그때까지 저녁을 못 먹어서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보름달 카스텔라 봉지를 뜯는 순간 민석이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었던 날이에요. 누군가 긴급번호로 전화를 해 준 거였어요.
▷지금 아이들이 모두 세례명을 갖고 있습니다. 가타리나, 가브리엘라, 라파엘. 이 힘드신 마음을 신앙에 의지를 많이 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떠셨습니까?
▶고 최민석 어머니: 신앙이라는 게 없었으면 생명에 대한 거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냥 민석이를 따라갔을 것 같은.
▶고 유연주 아버지: 저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제가 모태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지 30년 정도 됐는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제가 성당에 나가고 싶은 거예요. 힘들어도 하느님 앞에 가서 잠이라도 자고 오자고 하고 성당에 가서 항상 미사 드리고 왔었는데 이런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도대체 믿음이라는 게 뭘까. 주님께서 우리가 신자들이 믿음을 강조하고 믿으라고 하는데 믿음이라는 게 뭘까 생각을 해봤는데 참사를 겪으면서 믿음에 대한 소신을 가졌습니다. 참사 당일 날 주님이 보여주신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희생, 하느님이 보여주신 독생자 아들을 모셔 가시는 마음이 저희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6개월 정도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는데 부활을 겪고 하면서 하느님이 이런 걸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구나. 그러면서 신앙심으로 지금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고 신애진 어머니: 기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결혼하면서 성당을 오래 못나가서 냉담을 했었고요. 애진이도 화세를 받았어요. 엄마가 성당을 열심히 다녀서 어렸을 때 엄마가 키워 주셨었거든요. 할머니한테 자기는 세례명 받으면 가브리엘라 하고 싶다고 늘 얘기를 했었는데 저랑 살게 되면서 성당을 못가서 영세를 어렸을 때 못 받았어요. 그래서 신부님께서 이렇게 줘도 된다. 애진이가 어렸을 때 가브리엘라 하고 싶어 했으니까 세례를 나중에 애진이 떠나고 나서 화세라고 하시더라고요. 화세를 받았고요. 애진이를 보내고 나서 갈 데가 성당밖에 없었어요. 어딘가 마음을 둬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갈 곳이 성당밖에 없더라고요. 저는 많이 걸었어요. 집에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저희 집 인근에 있는 성당을 안 가봤는데 그 성당을 모두 다 다닌 것 같아요. 길 가다가 성당 나오면 들어가서 초 켜놓고 기도하고 또 걷다가 성당 나오면 초 켜놓고 기도하고 그런 생활을 굉장히 오래 했어요. 여러 달 그런 생활을 했고요. 그리고 성모님께 기도를 많이 했죠. 오랜 시간 냉담을 했기 때문에 바로 기도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어요. 예전에는 피에타를 보면 조각상인가 보다. 아름답다,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구나. 그랬는데 지금은 피에타를 보거나 성모님을 보면 나와 같이 자식을 잃은 아픔이 있으셨겠구나. 그 아픔을 이겨내기가 정말 힘드셨겠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힘드셨겠다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죠. 그래서 성모님께 공감을 한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그래서 성모님이 전구자 역할을 하시나보다라는 생각을 해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아픔을 겪고 이겨냈기 때문에 전구자 역할을 하시는 게 아닐까. 정말 힘드셨겠다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죠.
▶고 최민석 어머니: 어떤 마음이라기보다는 인간된 욕심으로 민석이 영혼은 하늘에서 처음부터 잘 쉬고 있는데 인간의 욕심으로 민석이를 곁에 두고 싶었던 거고 두 번째는 인정할 수 없었어요. 인정할 수 없었고 아팠던 아이가 떠나도 인정할 수 없고 부정하고 싶을 텐데 인정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이 조사만 되면 보내자고 생각했고 책임자가 처벌되면 보내자. 이거는 순리적으로 될 거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데 아니었고 그러면 날 따뜻해지면 봄에 보낼까 했고 매일매일 연습하고 결심했죠. 보내려고. 부활절이 되면 보내야지, 아니야. 300일 아니면 좀 더 데리고 생일 때 보낼까. 자꾸 매일매일 결심을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왜냐하면 그래도 민석이 쓰던 방에 민석이가 그대로 있다고 생각을 하고 내가 씩씩하게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이렇게 유가족 활동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어제 보내고 나니까 민석이를 집에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씩씩했던 거구나. 그 생각을 했고 이번에 특별법이 통과가 됐을 때 사실은 그때도 보내려고 했었어요. 그랬는데 안 됐고 최근에 친구들이 제대한 친구도 있고 1주기가 되니까 집으로 왔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민석이 방이 너무 좁고 절친하고 상의를 하니 어머니 마음이 중요하지만 친구들이 여러 명이 다녀가고 아무 때나 엄마랑 거치지 않고 다녀갈 수 있으려면 그래도 추모관이 좋아요, 어머니. 그런데 엄마 마음이 중요하니까 힘들면 다음에 또 해도 된다고 얘기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 혼자만 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친구들한테 양보를 하고 보내주는 게 맞겠다 싶어서 결심을 해서 1주, 2주 전부터 조금씩 옮겼어요. 어제가 마지막으로 민석이까지 옮기는 날이었어요.
▷큰 결심을 하셨던 거네요.
▶고 최민석 어머니: 이제 실천이 된 거죠.
▷방송 함께하고 계신 분들도 추모 메시지 보내주고 계신데 평화님께서 이태원참사 유가족 분들 힘내시고 건강하시고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마음을 모아주셨는데요. 마지막 순간 아이들이 있었던 골목을 참사현장이 아니라 지금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고 골목 초입에 우리에게 아직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남아 있다는 문구의 바닥 표지석도 생겼더라고요. 이렇게 하기로 뜻을 모으신 배경 들어보고 싶습니다.
▶고 유연주 아버지: 이태원의 젊은이들이 모였던 핼러윈이라는 행사는 모든 전 세계인의 행사로 지금 페스티벌 같은 행사입니다. 그런데 핼러윈이라는 행사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 안에 있었던 우리 어른들의 관리체계가 잘못된 것이었지 페스티벌이 잘못된 건 아니었거든요. 그 골목을 슬픔에 잠긴 골목을 슬픔으로만 기억하지 말고 아이들의 기억과 다시 즐길 수 있는 젊음의 장으로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을 추모하고 지금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미완성인데 계속 바뀌어 나갈 거고 진상규명이 되면 우리 아이들을 온전히 추모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와서 보고 우리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이 함께 즐기다가 이렇게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잘못 때문에 간 이 장소라는 거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 제대로 된 추모공간을 마련할 겁니다.
▷아직은 미완성이라고 얘기해 주셨는데 탈바꿈한 이태원길 다녀오셨습니까?
▶고 최민석 어머니: 저는 변모한 이태원을 가본 건 아니고요. 참사가 난 이후에 민석이가 저녁을 먹었던 그곳부터 시작을 해서 아파서 마주할 수 없는 그곳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다섯 바퀴 정도 돌았어요. 그리고 바뀐 곳은 아직 못 가봤고요. 추모관 다녀온 오늘 버스를 타고 오는데 홍대를 지나게 됐거든요. 홍대가 핼러윈 파티가 홍대에서도 하고 이태원에서도 하고 곳곳에서 하잖아요. 그래서 그 준비를 하는 행사를 봤는데 지금 경찰들이 준비하고 있더라고 요. 인력배치해서 단도리하고 있었고 가드나 펜스 곳곳에 설치하는 거를 보고 지나고 오면서 그날은 저렇게 했어야 됐는데. 하던 일을 왜 안 했을까.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고 신애진 어머니: 저는 아이 보내고 사망신고 하기 전에는 한 번은 갔다 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망신고하기 전에 사망신고 하는 날 갔다 왔어요. 그래도 장소는 한 번 보고 사망신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날 갔다 왔고요. 녹사평분향소 있을 때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 미사 하는 날 2차 가해가 굉장히 심했어요. 그날 행진 코스가 그 골목이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신부님들하고 그 길을 걷는 걸 한 번 해봤고요. 그래도 신부님도 계시고 수녀님도 계셔서 그날 처음 갔을 때보다 편안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걸어갈 수 있는 마음은 됐던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는 가본 적 없고요. 지금 기억과 안전의 길로 탈바꿈하고 있잖아요. 상인 여러분들도 정말 힘들었을 거고 그 공간을 그렇게 내어주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유가족 마음 잘 이해해 주셔서 같이 기억의 길을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회가 되면 이태원 상인 분들도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셨을 거예요. 아이들 참사 현장도 직접 보신 목격자이기도 하고 또 생계가 있는 곳인데 장기간 어려움도 계셨을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협의해 주셔서 그런 길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조금 더 마음에 힘이 나면 꼭 한 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이 애진 양 생일이었어요. 애진 양이 다니던 학교에 기부를 하셨더라고요.
▶고 신애진 어머니: 제가 한 게 아니라 애진이가 했다고 봐야 하고요. 부의금을 안 받겠다고 했는데 여러 분이 소식을 들으신 분들도 마음을 보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부의금을 가지고 오셨고 애진이 친구들도 어린아이들인데 부의금 내고 조문하면서 손을 바들바들 떨고 갔어요. 그렇게 모아준 마음을 소중하게 잘 써야 되겠다고 신랑하고 장지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했었고요. 애진이 아카이브 정리를 하다 보니까 애진이가 모교에 장학금 주기, 모교에 건물 지어주기 다른 게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걸 소중하게 쓰기로 했는데 애진이가 모교에 기부하기를 원했으니까 학교에다가 기부를 하면 좋겠다. 그건 저희가 한 게 아니고 애진이 심부름을 대신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마음을 의지하고 기대는 곳이 종교라면 현실을 바꾸는 건 국가와 정치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유가족들이 원하시는 진실규명에 대해서 우리 정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짚어보겠습니다.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아직 통과되고 있지 않은 부분 어머님도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런 부분이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이게 되면 해 줘야지 계속 마음을 먹으셨다고 얘기해주셨는데 이 답답한 상황 어떤 얘기해 주고 싶으세요.
▶고 최민석 어머니: 방송으로 다하기는 너무 많은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국가는 정말로 지금의 국가는 너무 잔인한 것 같고 사실 조사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건데 그것도 안 돼 있고 해괴하잖아요. 영정 위패 없고 근조 리본 거꾸로 달고 꽃무덤에 조아려서 조문하고 추모하고 그런 것부터가 잘못 알려진 언론에 우리 아이들은 범죄자가 됐잖아요. 그 사실을 언론에서 수정 정정보도를 안 했어요. 마치 우리 아이들이 범죄자인 것처럼 낙인을 찍어버려서 시민들마저도 2차 가해를 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고 관심도 두지 않는 것 같아요. 국가에서 걸맞한 일이 지금까지 국가에서 저희를 탄압하고 핍박하고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방송에 다 담기는 많지만 간략하게 우리가 요구하는 거는 처음부터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똑같아요. 첫 번째는 사실을 조사를 해야 하잖아요. 사실을 조사하는 거는 원칙이 있잖아요.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 증인 모든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돼서 여야당 그리고 유가족 몇 명 이렇게 조사를 했는데요. 여든 야든 전문가들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요청하는 바는 원하는 특별법의 첫 번째는 사실조사를 함에 있어서 전문가들이 직접 조사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전문가들 추천을 유가족들이 해달라는 거였고요. 두 번째는 그 조사를 할 때 영상도 필요하고 자료도 필요하고 기록물도 필요하고 또 현장에 찾아가야 하고 동행도 해야 하거든요. 그거를 거부를 할 경우에 저희는 벌칙을 1년 이하의 징역으로 요청을 했는데 3천만 원 벌금으로 조정이 됐어요. 그 3천만 원으로 자기 죄를 자기 책임을 면피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 또 벌금을 내고 500명이 죽든 600명이 죽든 3천만 원을 내면 전가되고 책임이 내려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다음에 또 다른 사고가 자꾸 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년 이하 징역을 요청해서 그 사람이 다시 복직할 수 없게 요청했는데 안 됐고요. 세 번째는 아까 애진이 어머니께서 이태원 상인들 고마움 표시해주셨는데 모두가 피해자거든요. 그 상인 분들 마찬가지로 피해자지만 우리 민석이나 연주나 애진이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정신적으로 몸 적으로 피폐해지고 쑥대밭이 됐어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우리가 요청하는 피해자는 희생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목격했던 사람, 현장에서 살아남은 희생자, 다친 사람 그 이태원이라는 곳에서 생업을 했던 사람까지 포함을 했었는데 안 됐죠.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고 유연주 아버지: 저희를 바라보는 게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바라보는데 저희는 정치를 모릅니다. 그냥 희생자의 부모일 뿐이고요. 지금 이번에 대통령께도 저희가 초대장을 보냈고 그다음에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에게도 모두 다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참가하신다는 분도 계시지만 어제 대통령실에서 발표를 한 걸 보니까 정치적으로 또 몰아가더라고요. 그러면 야4당이 동참을 하면 국민의힘도 동참을 하면 정치인 전부 다 동참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대통령도 같이 와서 추모해 주고 온전히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추모해 줄 수 있는 날인데 또다시 정치적으로 핑계를 대면서 참석을 못한다는 이유를 대는 거는 이제는 저희가 정말 기다릴 때까지 기다렸다는 마음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대통령 자리 비워두실 거죠?
▶고 유연주 아버지: 그러고 싶습니다. 지금 심정으로서는. 그런데 저희가 그래도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니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민으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 마음이 언제까지 저희가 수그리고 있어야 할지 저로서도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끝으로 아이들한테 전하는 말씀 한마디씩 청해보겠습니다.
▶고 신애진 어머니: 애진이한테 편지 쓰는 게 가장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애진아, 늘 그랬듯이 사랑하고 행복하고 너의 모든 건 엄마가 다 기억할 거야. 그러니까 어디에 있든 편안하고 행복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사랑해, 애진아.
▶고 최민석 어머니: 민석아,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늘 뭔가를 해주고 싶어 했던 그리고 커서는 늘 엄마 걱정을 했던 민석아. 이제는 엄마 걱정하지 말고 엄마 씩씩하게 살다가 민석이 만날 거니까 엄마 걱정 내려두고 두 분 할아버지와 저스틴 이모부랑 하느님 아빠랑 성모님 엄마 곁에서 행복하게만 지내다오.
▶고 유연주 아버지: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분향소에 가서 보면 저희 아이들 영정을 쭉 보고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그 아이들의 모습이 어머님, 아버님 모습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많이 보신 분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제 안에 연주가 있다고 생각하고 연주와 함께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뒤에서 주님이 지켜주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