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 : CPBC 라디오 <김준일의 뉴스공감> (FM 105.3 MHz 18:03 ~ 19:00)
○ 일자 : 2026년 2월 19일 목요일
○ 진행 : 김준일 앵커
○ 출연 : 박광일 역사작가
▷앞서 전해드린 대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법원의 시간은 1심이라는 매듭을 지었지만, 역사의 시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30년 전에도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법정에 섰던 날, 역사는 큰 물줄기를 틀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이 판결이 우리 역사 600년의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박광일 역사작가와 함께 ‘역사의 법정’을 열어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작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오랜만에 왔습니다.
▷오늘 또 공교롭게 이렇게 선고가 되는 날 딱. 공교로운 게 아니죠. 의도를 가지고 모신 건데. 오늘 어떻게 들으셨어요? 오늘 판결 보셨을 텐데.
▶저는 생방송으로 보지는 못했고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접했는데. 전반적으로 예측했던 어떤 사항들을 지적하고 거기에 따른 판결이 나왔다라는 부분들은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만’이라는 표현 다음에 붙었던 그러한 이유들. ‘고령’이라든지 그다음에 치밀하게 계획되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들이 과연 감형의 사유가 되는가. 왜 사형과 무기징역만 그 또는 무기 금고만 내란죄에다가 성립을 어떤 형량을 정해놨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조금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오늘 417호 법정이 또 예전에 전두환.
▶내란목적 살인.
▷재판이 있었던 곳이죠?
▶맞습니다.
▷옛날 96년이었죠. 딱 30년 전이네요. 그것도. 그게 좀 떠올랐어요. 저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그 이전에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과, 검찰이 내세웠던 논리가 무너졌던 역사적 사건이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있어서는 실패한 내란이라고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다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획을 긋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오늘 판결문 중에 역사학자로서 굉장히 흥미롭게 보셨을 대목이 있었는데. 1649년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재판’이 오늘 언급됐어요. 재판에서. “최고 권력자라 하더라도 헌정질서를 침해하면 반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게 또 여기에 나오는 게 맥락이 맞는지. 이런 지적을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저는 현대 대한민국의 반헌법 어떤 범죄에 대한 부분들을 여기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을까? 라는 부분들이 들었고요. 다만, 찰스 1세 재판은 그 결과가 사형으로 이어졌었거든요.
▷왕이 사형당하는 게 굉장히 놀라웠죠.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하고 연결해서 얘기하려고 했던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무기징역으로 나왔거든요. 그렇다고 한다고 하면 오히려 조선시대에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의 결과로 연산군과 광해군이 귀향. 유배를 떠나게 되거든요. 이게 조선시대 기준으로 귀향은 무기징역에 해당합니다.
▷그러겠네요.
▶예. 기한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면에서 우리 역사 속에서 그 사례를 찾았으면 조금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서, 군주에 있으면서 어떻게 보면 국왕이 가져야 될 권한을 넘어섰다라는 것들이 당대의 그 반정의 이유였다는 점에서 그런 어떤 것들이 지금의 재판하고 연결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두환 영화(‘서울의 봄’) 대사로 그 유명한 말이 나오잖아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성공하면 왕이 되는 거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거잖아요. 그 많은 쿠데타라. 그때는 쿠데타라는 용어가 없었지만, 방금 말씀하셨던 중종반정, 인조반정 이런 것들 여러 장면들이 있었는데, 좀 설명을 해 주시죠.
▶이게 굉장히 조금 지금의 내란 상황하고는 비교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왕이 되었던 존재가 연산군과 광해군인데. 그들이 왕으로서 행해야 될 정치, 즉 공적 영역에서 취해야 될 태도를 사적 이익. 자신의 어떤 권한을 강화한다거나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도를 무력화시킨다거나. 이런 부분들이 결국은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의 이유가 됐었거든요. 그러니까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지금으로 치면 쿠데타의 개념보다는 혁명의 개념으로서 공적 원리 공적 원칙을 복원시킨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했고, 그거를 무너뜨렸던 게 연산군과 그다음에 광해군이다. 이런 평가를 조선시대에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조금 다른 영역에 있었던 게, 요즘 왕 영화로서 등장하는 단종과 세조의 관계가 조선시대에 굉장히 어렵고 평가하기 복잡한 문제였던 거죠. 이 부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는가라는 조선시대의 어떤 문제들을 제기했던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말씀하신 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말씀하신 거죠?
▶맞습니다.
▷단종을 폐위하고 수양대군 본인이 왕이 된.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조금의 절차가 있었다라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은데요. 보통 우리가 계유정난이라고 하는 사건을 계기로 바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지는 않습니다. 계유정난에서는 당시 수양대군이 내세웠던 것들이 사적 영역으로 무너진 정치를 복원한다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 김종서, 황보인 등으로 중심이 됐던 의정부의 재상들이 어떤 권력을 농단하고 있고, 거기에 안평대군이 부화뇌동해서 결국은 지금 단종의 정치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 나는 그거를 정상화시키겠다라고 명분은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독점하는 과정이 계유정난이었거든요. 그리고 계유정난이 있고 나서 2년 뒤에 우리가 알고 있는 단종을 상황으로 몰아내고. 그리고 나서 나중에 사육신의 난을 계기로 청령포로 영월로 유배를 보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부터가 단종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것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상황이 적절했느냐라는 부분들이 조금 두 개의 영역으로 분리가 되는데요. 전체 맥락에서 지금 역사에서 바라볼 때는 결국 계유정난도 단종을 죽이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라고 보고 있어서 비판의 대상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역사 속에서 살짝 생각해 보면 의아한 부분들이 하나가 있습니다. 왜 사육신으로 평가되는 성삼문,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 이런 사람들이 계유정난 때 죽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볼 때는 계유정난까지는 공적 영역을 복원하고 수양대군이라고 하는 개인의 이익의 어떤 정치를 활용한 것은 아니라고 봤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내니까. 그렇다면 정통성을 가진 왕을 어떤 사적 권력을 통해서 몰아냈다면 이거는 우리가 정상화시켜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사육신이 역모와 같은 당시로 볼 때는 어떤 혁명을 꾸미게 되는데 이게 실패로 돌아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두 사건을 살펴본다고 하면 당시에도 이 명분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어떤 이슈로 작용하고 거기에 따라서 사람들이 움직였겠구나라는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권력 찬탈은 사실은 권력을 잡자마자 바로 왕이 되거나 그러진 않고. 예를 들면 전두환도 이를테면 12.12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부를 먼저 장악하고. 조직을 하나씩 장악하면서 나름의 자신에게는 절차적 정당성이 있다라는 걸 하기 위해 또 선거로. 그게 직접선거가 아니라 간접선거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집권하니까. 그렇게 보면 세조도 굉장히 닮은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러니까 세조가 그런 어떤 루트를 밟아가면서 명분을 했지만, 이게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게 뭐야? 하면서 끌려갔던 부분들이 계유정난이었고. 그런데 이게 명백하게 잘못 가고 있구나라고 느꼈던 게, 정통성이 있는 왕이었던 단종을 상왕으로 몰아낸 것. 그러면서 여기에 이 명분이 실제하고 부합하지 않는구나라는 걸 파악하게 됐다고 볼 수가 있고. 군사정부 시절에 많은 시민단체나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했던 것들이 이런 모습하고 또 오히려 비슷한 부분들이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런 얘기가 있는데. 결국은 세조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는 했지만, 세조의 후손들이 결국은 왕위를 계속 차지하면서. 세조도 어떻게 보면 재평가가 되고 추앙을 받았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굉장히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뭐냐면, 세조 이후에 세조에 대한 평가를 감히 가타부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왕과 신하가 공동으로 통치해 나가는 나라인데, 거기에서 의와 명분이 없다면 이 나라는 더 이상 운영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사림들이 볼 때는 뭔가 역사적인 재평가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던 거죠. 그게 숙종 연간 이어졌던 단종의 복권, 사육신의 복권이거든요. 대략 한 240~250년 정도가 소요됐습니다.
▷오래 걸렸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적 평가라는 말을 좀 쉽게 밖으로 내뱉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문제 해결을 240년 250년 뒤에 한다고 하면 그게 과연 정의일까? 라고 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 많이 얘기됐던 역사적 평가를 현대에 가능하면 끌어오지 않는 게 좋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군요. 200년이 걸린 거는 직접적 이해 당사자가 한 3대 정도 되면 그 사람들이 모두 사망한 뒤에서나 그거를 언급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이 되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때조차도 지금처럼 명백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조는 잘못이 없는데, 세조 옆에 있었던 신하들의 말을 잘못해서 단종을 죽이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다음에 사육신은 분명히 변란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충절에 의해서 변란을 일으킨 것이니까 복권을 해야 한다라고 하는, 굉장히 제한적인 한정적인 상황에서의 복권이었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세조는 성공해서 처벌을 안 받았지만, 1996년에는 성공했지만 처벌을 받았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재판이 딱 30년 전에 있었는데요. 이거의 문명사적 의미 현대사적 의미를 좀 설명해 주시죠. 1996년의 재판.
▶보통 성공한 쿠데타 또 권력을 잡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후에 있어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었던 거죠. 예를 들어서 1994년에 전두환, 노태우. 특히 전두환에 대한 처벌을 처음 그러니까 고소했던 인물이 장태완 장군입니다. 그러니까 장태완 장군이 당시 12.12 군사쿠데타가 문제가 있었다라는 것들에 대해서 조사하고 여기에 대해서 재판을 해달라고 검찰한테 얘기했었는데, 이게 그 유명한 기소유예 처분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검찰에서 했던 얘기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그 말이 여기서 나온 거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처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국력 소모를 막고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자라고 검찰 측에서 기소유예의 변을 내렸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이것이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면서 정치권에 큰 휘발성을 가진 어떤 사건으로 발화가 됐고요. 그러면서 여기에서 정부 안에서는 12.12 사태. 당시 12.12 사태라고 봤고. 그다음에 5.18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처벌해야 된다라고 하는 내용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5.18 유족과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내란과 살인. 이런 내란목적 살인에 의한 처벌을 요구하게 되면서 다시 고소가 이루어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2차로 다시 재판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죠.
▷그 직전에 1995년 10월에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굉장히. 박계동 의원이 터뜨리면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민심이 좀 들끓었고. 그리고 당시에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라고 하는데. 당시 사법연수생이었던 정한중 씨가 헌법 규정상 재직 중에는 소추할 수 없으므로 공소시효 계산에서 재직 중은 제외해야 되니까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이 정한종 씨가 지금은 소청심사위원장이시네요. 이분이. 그래서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일단 다시 특검을 통해서 96년에 재판이 됐습니다. 그래서 1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형이.
▶선고가 됐습니다.
▷그리고 2심에서 무기징역.
▶그렇습니다.
▷그렇게 됐죠. 그 과정은 좀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런데 이 1심에서 사형이 나왔던 부분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헌법에 따라서 재판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데. 헌법과 형법에 따라서. 그런데 문제는 2심에서 민주 회복에 기여했다. 즉, 6.29 선언을 통해서 어떻게 보면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어 주었다라는 부분들이 하나가 있었고. 두 번째는 민주 공화정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항장불살(降將不殺)’이라는 의미를 살려야 되지 않느냐. 즉,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라는 관점에서, 그렇기 때문에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으로 감해야 한다라는 논리를 당시 재판부에서 펼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이게 왜 갑자기 여기에서 등장하며. 사실은 이 항장불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떠올렸던 장면은 처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골목길 성명을 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될 것 같은데요. 그때 자기는 아무 죄가 없고 검찰이 어떠한 요구를 하더라도 거기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게 되면서 결국은 합천으로 가버리잖아요. 그러면서 검찰이 체포조를 만들어서 합천에서 현장에서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게 되는데요. 이런 과정을 보게 되면 결코 항복한 인물도 아니라는 점.
▷항복이라는 거는 글쎄요.
▶잘못을 반성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 이때 2심에서 무기징역이 나오고 3심에서 그것이 확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상황에서 이러한 죄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감했다는 것들은 당시에서는 굉장히 큰 논란. 지금도 큰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심에서 22년 6개월이 나왔고, 2심에서 18년형인가 정도 나왔는데. 문제는, 사법적 단죄가 내려진 지 750일. 약 2년 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어요. 이게 김영삼 대통령 말기였습니다. 외환위기 즈음에서.
▶그렇습니다.
▷그때 국민통합이 명분이었고.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였나요?
▶당선이 된 지 4일 만에.
▷4일 만에 김영삼 대통령한테 요청해서.
▶요청해서 이루어진 방식인 거죠.
▷어떻게 보십니까? 그거는.
▶그래서 이 부분이 결국은 반성하고 거기에 대한 참회와, 거기에 대한 어떤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었느냐라고 봐야 되는데. 그 이후로 전두환 씨가 그 이후에 행했던 여러 행동들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고요. 많은 사람들을 그때 분노하게 했던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뭐냐면 기자들에게 감옥 가지 않도록 해라. 감옥이 힘들더라. 농담했던 부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켰고. 이 재판의 진실성 그리고 역사적인 평가를 폄하하는 그런 국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결국은 이 시기에 재판까지는 일정하게 역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사면으로서 그 의미가 상당 부분 무너지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에 국민들이 뒷목을 잡는 일이 굉장히 많았잖아요. 재산 추징하려고 했을 때, 내 전 재산 29만 원이다라고 하면서 계속 골프 치러 다니고. 그러기도 하고. 고(故) 조비호 신부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또 불출석하고.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자서전에 오류가 있었던 고의적인 어떤 왜곡 상황들도 다시 수정하도록 명령을 받기도 했었고요.
▷그렇군요. 결국은 이 사면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니냐. 물론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도 뭔가 고심이 있었고 이런 것들을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했지만, 사면 자체가 굉장히 잘못된 역사적 신호를 보낸 거 아니냐. 이런 얘기들이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게 무기징역이었고 지금도 만약에 그 당시 범죄를 가담했던 사람들이 그런 처벌을 온전하게 받았다면 지금의 윤석열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라는 부분을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번 재판부에서 이 내란과 관련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감할 수 있는. 형을 감하는 평가를 했다라는 것들은 향후에는 그러면 성공하지 못하면, 그러면 내가 죽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내란 수괴가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점에서 그때의 사면과 지금의 어떤 재판이 일정 부분 약간 오버랩되는 부분들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과거의 사례, 그리고 오늘의 재판이 국민들에게 남긴 교훈 한마디 해 주시죠.
▶그래서 보통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정치권에서 역사의 평가, 역사의 재판에 맡기자고 하는데요. 그거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을 회피하려는 용어일 뿐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것을 기록하는 것이지, 미래의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현재 공화정에서 처벌할 수 있는 것들은 명확하게 처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박광일 역사작가와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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