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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기다리는 거지들”

[장현규 수녀의 사랑의 발걸음] 18. 선한 목자만 따라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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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과 만남- 공통의 하느님 인식

이전에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겠지만, 이제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하느님은 좁은 의미의 하느님, 즉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만의 하느님이 아닌, 온 우주의 하느님, 모든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이 방문 이후에 이슬람인들의 살랏(Salat, 하루에 다섯 번 하느님을 경배하는 기도)에 탄복하여 그리스도인들도 하루에 적어도 한 번 같은 시간에 하느님을 경배하는 기도를 드릴 것을 제안하였다. 물론 이 제안이 그리스도교 세계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이 제안의 배경이 바로 이슬람 지역에서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실 프란치스코와 술탄은 이 만남을 통해 서로를 적으로서가 아니라 형제로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1220년에 십자군이 다미에타를 정복한 이후에, 프란치스코는 아마 성지의 그리스도교 유적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나서 프란치스코는 아크레(Acre, 현재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항구도시로서 아코-akko-라고도 함)로 갔는데,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술탄의 허락을 얻어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성지에 현존하게 되었다. 물론 그 후 오랫동안 수천 명의 작은형제들이 사라센인들에 의해 순교하는 고통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동방으로 여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1220년에 다미에타에서 비트리의 야고보가 쓴 편지로 입증된다.



술탄과 만남 예언자적 행위

아마도 프란치스코가 당시 교회와 국가가 다 열광적이었던 십자군 전쟁에 대해 반기를 든 이 사건을 살펴보게 되면 프란치스칸 운동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인 ‘예언자적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프란시스 드 비어(Francis De Beer)라는 사람이 「We Saw Brother Francis」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당시 십자군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즉, 전쟁과 정복을 통해 어떻게든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복파’와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해 가면서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교파’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펠라지오 추기경이 정복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Jean de Brienne)이 외교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십자군으로 행동하기를 거부하였으므로, 그가 한 예언자적 행위는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술탄 앞에서 자신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였다. 드 비어는 프란치스코의 이 행위가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증명을 위한 것이라고 기술한다. 프란치스코는 전적으로 주님 영의 이끄심에 깨어있고자 노력하였던 사람이었고, 또 세상이 선물이라는 점을 마음 깊이 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는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복음적인 것, 즉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고 그 선이 실현되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에는 “예”라고 말한 예언자 중 예언자였다.

그의 이런 예언자적 행위는 형제들이 사라센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 사이에 갈 것인지를 권고하고 있는 그의 1221년 ‘수도 규칙’(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16장에서 잘 드러난다.

“한 가지의 방법은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복종하고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6절)

이 첫 번째 방법은 진정한 순종과 관련된다.(참조: II첼라노 152, 봉사자 형제에게 보내신 편지 4절) 이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하신 의지를 기다리는 행위이다(1221년 회칙 23,5; 11). 주님에 의해 위로부터 권한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프란치스코에 대해 권한을 갖지 못했으므로(덕행들에게 바치신 인사 18절),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로, 모든 이에게 복종하며 간다는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구걸하는 그리스도와 연결하고자 했던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이에 대해 충분한 증거가 된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모든 이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도록 이끈 그의 인간성이다. 프란치스코에게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기다리는 거지들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위의 권고를 한 다음에 바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다른 방법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이 전능하시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아드님을 믿도록, 또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7절)

프랑스에서 함께 사는 동료 수녀님들은 매년 여름이면 2주 정도 피정 겸 휴가를 떠난다. 원한다면 가족도 방문하는 시기가 이때다. 이때마다 내가 피정 겸 휴가로 머무는 곳은 프랑스 남쪽 시골 마을에 있는 수도원이다. 우리 수도회의 많은 수사님과 수녀님들도 이곳에 머물곤 한다. 자연을 벗 삼은 수도원의 마당에는 넓고 푸른 초원,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내가 이곳에 맨 처음 왔던 때는 1986년 12월, 그러니까 프랑스에 온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은 때였다. 막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는 성탄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명절 또한 성탄절이기에, 이곳 수도원이 있는 시골 사람들도 최고의 축일을 보내고 있었다. 성탄의 기쁨은 도시인들의 그것과도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에 막 당도했던 당시 나의 마음은 자못 쓸쓸했다.

한창 추운 겨울이었던 그때. 이곳 들판에 하얗고도 살포시 내린 눈 속에서 푸른 풀들을 마주했다. 작은 한 순간이었지만, 문득 신비로운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 주님께서 새 세상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여겨졌다. 눈을 돌려보니, 영화에서만 보던 양 떼들이 보였다. 회색빛의 작은 몸뚱이가 통통한 데다,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양 한 마리가 풀을 뜯어 먹는 모습도 이상하게 나의 눈길을 확 끌었던 기억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편 22장)라는 말씀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이어서 요한복음 11장 ‘목자와 양들’의 말씀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순간 성경 말씀이 바로 눈앞의 현실처럼, 그것도 잔잔히 펼쳐지는 광경이 내 안에 작고 놀라운 감동마저 가져다줬다. 수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막 시작한 나에게 일어난 작은 기쁨이자 체험이었다. 내 마음은 환해졌고, 푸르름으로 물드는듯했으며, 쓸쓸함은 금세 가셨다.

나는 계속, 그리고 천천히, 편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을 바라봤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등이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착한 목자가 준비해놓은 넓은 물통에는 물이 가득했다. 양들이 목이 마르면, 언제라도 즉시 와서 흡족하게 물을 마셨다. 양치는 목자는 그들의 귀여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양들의 행복감을 피부로 함께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이 모든 광경이 시편 23장의 이야기가 아닌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그리고 마지막 6절의 말씀.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해마다 성소자가 많이 줄고 있다. 그러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목자만을 따른다면 이처럼 큰 은혜와 행복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나는 삶으로 깨닫고 있다. 시편의 말씀이 우리를 잘 인도해 주고 있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마주했던 드넓은 초원과 귀여운 양 떼들이 보고 싶을 때면, 다시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편을 노래한다. 그러면 어느새 나는 초원의 양이 되고, 희망찬 푸름이 솟아오른다. 눈앞에 원대하게 펼쳐진 대자연을 보며, 내 안에 모든 언어는 사라지고, 평화로운 침묵만이 나를 포옹해준다. 이것이 수도자의 기쁨이다.

프랑스 성요한 사도 수녀회 장현규(마리스텔라)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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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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