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의 순례일기](6)형제를 사랑하라
| ▲ 노 사제가 친구 사제에게 건넨 아이스크림에는 미안함과 고마움 등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을 것이다. 블레드 섬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두 사제. |
몇 해 전, 은사 신부님의 반가운 연락을 받았습니다. 철학자이신 동시에 가톨릭대학교 총장까지 역임하신, 학생 시절 신부님의 수업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항상 마음속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던 분이셨지요. 사제품을 받은 지 42년이 된 동창들 다섯 명이 함께 순례를 가고 싶은데, 인원이 너무 적으니 다른 순례자들을 모아달라는 부탁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우연히도 청주교구의 두 젊은 동창 신부님께서도 참가를 신청하셔서, 순례단은 일곱 분의 신부님과 14명의 신자로 꾸려졌습니다.
일정 도중, 발칸 반도의 작은 나라인 슬로베니아를 지났습니다. 독일, 로마, 슬라브 문화가 교차하는 위치의 슬로베니아는 8세기에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치하에서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서유럽 문화권에 편입되었습니다. 인구는 고작 200만 명에 국토 면적은 한국의 1/11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 땅의 절반은 산악지대인 환경이지만, 일찍부터 공업을 발전시킨 덕분에 발칸 지역 내에서 가장 부유하며 아주 높은 수준의 문화적 발전을 이뤄낸 나라입니다.
우리는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숫가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호숫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브레제에라는 곳에 있는 ‘도움의 성모 성지(The National Shrine of Mary Help of Christians)’를 방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직접 미사를 봉헌한 곳이기도 합니다. 무릎을 꿇은 채 작은 성모 경당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전례 예식은 오래된 전통이고요.
목적지는 브레제에였지만, 블레드 호수의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블레드는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알프스 산자락이 병풍처럼 주변을 둘러싼 아름다운 호수의 풍광은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호수 한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섬이 하나 있습니다. 육지와 섬을 잇는 배는 ‘플레트나’라고 불리는데, 자연 보호를 위해 뱃사공이 직접 노를 저어 운행합니다. 이 뱃사공들은 아주 엄격한 시험을 거쳐 선발된다네요.
섬에 도착해 99개의 계단을 오르면, 꼭대기에 성모 승천 성당과 종탑이 서 있습니다. 성당 내부의 긴 밧줄을 잡아당겨 종소리를 크게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의 종’이지요. 방문객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밧줄을 당겨 종을 울립니다. 그날도 소원의 종을 치기 위해 신부님들과 순례자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신부님께서 친구 신부님의 옷깃을 당기셨습니다.
“이 나이 먹고 무슨 소원을 빌어? 나가자. 나는 내 소원 직접 이뤄보련다.”
신부님께서는 친구 신부님을 부축해 햇볕 잘 드는 의자에 앉히고 아이스크림을 사온 뒤 숟가락으로 한 입 크게 뜨셨습니다. 사실 친구 신부님은 눈이 좋지 않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계셨습니다.
“한 번쯤은 이렇게 너한테 맛난 것 사주고 싶었다. 수도자로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좋은 음식도, 좋은 옷도 멀리하는 너를 보면서 반성도 많이 했었지. 교구 사제로서 너무 풍족하게 살았어, 나는….”
짧고 투박하지만 용기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서로 친하면 친할수록, 관계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가슴 깊이 숨겨둔 진심을 꺼내어놓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요. 친구 신부님은 심각해진 분위기에 머쓱해지셨는지, 아니면 오랜 마음을 고백하신 신부님이 민망할까 걱정되셨는지 크게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하셨습니다.
“에라, 이놈아! 고작 아이스크림으로 덮어쓰려고?”
“무슨 소리야? 이거라도 사서 먹여주는 게 어디냐?”
함께 소리 내어 웃으시는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에 녹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푸른 호수가 두 분을 감싸는 듯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호수 위의 성당에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종을 울리며 바라는 것도 충분히 간절한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작은 용기, 짧은 말 한마디가 속으로만 혼자 생각한 소원보다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가 닿을 기도라는 사실을 저는 그날 새로이 느꼈습니다. 볼 것도 즐길 것도 많은 유럽을 순례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저는, 화려한 유적과 웅장한 성당들을 셀 수 없을 만큼 보고 또 여러 곳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역사적인 장소나 커다란 성당에 자리하신 것이 아님을, 오히려 먼 길을 여행하며 그분을 찾아 나선 순례자의 가슴 속에 언제나 함께 계신 것임을 잊지 않아야겠노라고 재차 다짐하게 되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