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처음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이후 길고 긴 박해와 순교의 나날을 모르는 신자는 없겠습니다만,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역사에 예술과 아름다움의 나라 프랑스가 매우 깊게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프랑스, 그중에서도 파리는 한국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의 전교를 맡게 되면서 많은 선교사가 그들의 붉은 피를 한반도 곳곳에 흩뿌렸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목숨을 버릴 것을 알면서도 지구 반대편까지 나아가 본 적 없는 생김새의 신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려 했던 선교 사제들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파리의 한복판에 남아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맏딸로까지 불리는 프랑스지만,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중반까지 프랑스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는 일정 부분 교회가 초래한 비극이기도 했습니다. 1789년 5월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며 오랜 시간 철통처럼 이어지던 절대 군주 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누려왔던 세속의 권력에 부패한 상태였고, 결국 평민들은 교회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게다가 대혁명 이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을 무너뜨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곧 나폴레옹 1세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주교를 해임하고 국가에 충성 선언을 한 사제를 대신 그 자리에 앉히는 등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을 벌였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던 나폴레옹은 결국 비오 7세 교황님을 사보나와 퐁텐블로에 감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안에서도 파리외방전교회의 장상 신부님들께서는 머나먼 바다 건너편에서 자신들보다 더 큰 박해를 당하고 있는, 단 한 명의 사제도 없이 평신도의 힘으로 신앙을 지켜가는 조선 신자들의 피땀을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파리에 방문한다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정원을 꼭 들러보기를 바랍니다. 1852년 개장한 세계 최초의 백화점 르 봉 마르셰를 돌아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기적의 메달 성당(1830년 7월 18~19일 밤에 성모 마리아께서 24살의 수련 수녀 가타리나 라부레에게 발현하여 메달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장소)이 있고, 거기에서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파리외방전교회의 소박한 정문이 나타납니다. 신학교의 성당에는 조선으로 떠나는 사제들의 축복식 장면이 벽에 걸려있으며 그 아래층에는 조선을 비롯해 동남아에서 순교한 분들을 기억하기 위해 조성된 작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는 103위 성인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는데, 이국의 수도에서 만나는 한국 성인들의 이름이 새롭습니다.
신학교 뒤편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습니다. 그곳은 조선 선교를 떠나게 된 사제들이 마지막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고, 정원 한쪽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제발 제가 소임 받은 선교지에 살아서 도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바친 곳입니다. 또한 떠난 이들의 순교 소식을 몇 달이 훌쩍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신학생들이 뒤늦게나마 함께 모여 테데움(Te Deum, 감사의 찬미가)을 바쳤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당시 극동으로 떠난 선교사 중 많은 이들은 소임지에 닿기도 전에 풍토병이나 해적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첫 주교이신 브뤼기에르 주교님께서도 실은 조선 땅을 밟아보지 못하셨던 것처럼요.
마당 한쪽 편에는 그렇게 순교한 이들을 위해 한국 교회(명동대성당)에서 봉헌한 순교현양비가 서 있습니다. 그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마치고 나면, 정원에서 정문까지 다시 걸어가는 길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당시 선교지로 떠나던 선교사는 박수와 눈물로 인사를 건네는 후배들 한 명 한 명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그 길을 걸었을 테니까요. 살아생전 다시는 보지 못할 이들, 언젠가 자신과 똑같은 순교의 길을 걸어갈 이들을 뒤로 한 채 말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에는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부활을 향한 희망만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사순 시기를 마무리하고 또 부활절을 준비하며 생각해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음이란, 또 부활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의 나약함을 신앙과 사랑으로 물리쳤던 순교자들, 그리고 그들보다도 앞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다가오는 부활절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