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4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손해 좀 보지 뭐, 아이들을 위한 거니까”

[미카엘의 순례일기] (20)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순례<상>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주일학교 학생들이 신발을 벗어 한곳에 모아 두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광야를 걷고 있다.

 

 


몇 년 전, 모 신부님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의 순례를 준비하고 있으니 와서 상담해달라는 특별한 내용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성지 순례라니, 대체 얼마나 부자 동네에 있는 본당인지 민망한 궁금증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지 순례는 어른들도 선뜻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뒤 찾아간 그곳은 저의 궁금증이 무색하게도 지방 도시의 변두리 공업 단지 한복판에 자리한 작고 가난한 본당이었습니다. 성당 주위에서는 낡고 시끄러운 기계 소음이 멈추지 않았고, 공장 굴뚝에서 피어나오는 연기가 하늘에 가득했습니다. 외벽에 바른 흰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성당 건물은 마찬가지로 몹시 낡은 다른 건물들 사이에 비좁게 끼어있었습니다.

사제관에 들어선 저는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으레 사제관이라 하면 두꺼운 신학 서적들과 장서들로 잘 꾸며진 따뜻한 공간이어야 할 텐데, 고작 책 몇 권과 십자가 한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다 난방이 되지 않아 매우 춥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의 얼굴을 하신 신부님께서는 성당만큼이나 낡은 소파의 한쪽 자리를 권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믹스 커피를 타 주시면서 도시의 가난한 지역 본당에 부임한 뒤 이러한 순례를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다른 많은 성당처럼 무너져 가는 주일학교를 위해 여러 생각을 하신 끝에, 1년 전에 순례 계획을 발표하시고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을 요청하셨답니다. 이 지원금은 사정이 넉넉한 신자들이 큰돈을 내주시기보다는 아이들의 신앙을 위한 마음을 담아 조금씩 모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지요. 신자들은 한마음으로 지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노인대학 어르신들께서도 공장 주변의 폐지와 공병을 모아 판 돈을 매달 보태셨습니다. 물론 신부님께서도 사제생활비를 줄이셨으며 겨우내 사제관의 난방(낡고 오래되어 기름값이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을 끄고 의자 위에 놓인 작은 전기담요로 추위를 견디셨습니다. 마침 사제관 식복사께서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두셨는데 자매님들이 돌아가면서 신부님의 식사 준비를 해주시며 그 급여도 지원금에 보태겠다고 하셨다 합니다.

또, 신부님께서는 중고등부 주일 학교 학생을 한데 모아 수업 대신 신약성경 강의를 시작하셨고, 1년간 개근한 학생들에게만 순례 기회를 주겠다고 공표하셨습니다. 그러나 개근에 성공했다고 해서 ‘무료’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 집안의 형편을 세세히 알고 계셨던 신부님께서는 아이들을 한 명씩 따로따로 상담하고 각자 다른 순례 비용을 책정하셨습니다. 단돈 만 원이라도 직접 보태어 떠나야 한다는 의미셨습니다. 물론 누가 얼마큼 냈는지 비밀로 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저와 저희 회사에 요구하신 사항도 많았습니다. 첫째, 숙소는 가능한 한 성지에서 가까워야 하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넓은 마당이 있어야 하며 매일 숙소를 바꿔서는 안 된다. 둘째, 성지 내부나 성당 안에 머물기보다는 직접 발로 걸으며 그곳을 둘러보면 좋겠다. 셋째, 가이드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일정은 아이들 컨디션에 따라 언제든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마지막 조건은 다소 황당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번 순례에서 단 한 푼의 이익도 남기지 말아야 하며, 수고비는 순례가 계획대로 잘 진행된 후에 신부님께서 알아서(?) 책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순례와 다르리라고 예상하고 오긴 했지만, 이익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건 손해를 본다는 말과도 같아서 마지막 조항을 듣고는 순례가 성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조건을 들은 사장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그래, 손해 좀 보지 뭐!”

사장님은 두말없이 단박에 승낙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순례이자 여행이 되도록 신경 쓰라고도 지시하셨습니다. 저는 곧장 이스라엘 현지 여행사에도 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사실 일정을 언제든 변경할 수 있고 가이드를 맘대로 바꿀 수 있는 데다가 단 한 푼의 수익도 낼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선뜻 받아들일 여행사가 그리 많겠습니까마는, 그곳의 사장님은 어린 시절 수도 사제를 꿈꾸며 성소를 키웠던 분이셨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거잖아? 우리 아이가 그런 기회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참 좋을 것 같아. 한번 해 보자고.”

명색이 성지 순례를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미리 넘겨 짚어 판단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질 만큼 사장님 두 분께서는 흔쾌히 마음을 모으셨습니다. 이렇게 조금은 특별한, 하느님께서 직접 인도하신 것만 같은 순례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계속>



김원창(미카엘, 가톨릭성지순례 전문)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1-05-1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9. 14

에제 2장 2절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