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성지 순례 지도 사제가 호엔 짤츠부르크에서 부부 순례객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
저는 사진 찍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습니다. 꽤 진지한 취미이자 열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아 영원히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은 발명된 이래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만 진실입니다. 사실 사진은 일종의 왜곡입니다. 평면으로 남겨지는 사진은 3차원의 세계를 담아낼 수 없을뿐더러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오리무중이기 때문이지요. 사진은 그 순간의 시간과 공간을 불완전하게 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사진을 즐겨 찍는 것일까요?
오래전 연로하신 자매님께서 사무실로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순례를 마친지 한 달쯤 지난 후였습니다. 최근에는 핸드폰으로도 훌륭한 사진을 남길 수 있으니 따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당시만 해도 DSLR은 물론 소형 디지털카메라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필름 카메라와 필름통을 한아름 싸들고 여행을 떠나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소중히 사진을 찍던 시절입니다.(아마 필름을 갈아 끼우다가 실수로 햇빛에 노출되어 사진들을 새까맣게 날려버리고 안타까워했던 경험 정도는 있으시겠지요) 그 자매님께서는 꽤 값비싼 필름 카메라를 순례에 가져오셔서 수많은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사진을 찍는 자세는 조금 어설펐지만, 카메라가 없어 사진을 남기지 못하는 분들도 열심히 찍어주셨고 나중에 사진을 인화해서 보내겠다며 주소와 전화번호도 일일이 적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물으니, 자리에 앉자마자 자매님께서는 가방에서 여러 뭉치의 사진을 꺼내 놓으셨습니다.
“미카엘! 시간 좀 있지?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리 봐도 도대체 어딘지를 모르겠어. 순례했던 이들에게 사진을 보내야 하는데, 어디가 어딘지는 적어서 보내고 싶어서 그래. 좀 도와줘.”
자매님께서 꺼내 놓으신 사진 뭉치를 대충 세어보니 족히 500장은 되는 듯싶었습니다. 당시 필름 한 통이 24컷이거나 36컷이었으니, 아마도 하루에 1~2통씩, 필름 15통에서 20통은 찍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도저히 어딘지 알 수가 없는 사진뿐이었습니다. 똑같이 생긴 성당 벽 앞에 순례단의 얼굴들만 크게 찍어 놓으신 사진이 수백 장이었던 것입니다. “잘 찍었지? 이 형제님은 사람이 좋게 생겼어. 저 자매님은 기도를 열심히 하더라고”라며 연신 사진에 관해 설명해주시는 자매님 옆에서 저는 몰래 식은땀을 흘렸습니다만, 인화된 사진 구석에 함께 찍혀나온 날짜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자매님의 흥을 깨지 않고 눈치껏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장소를 찾아내는 일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야 겨우 마무리되었고, 순례 이야기는 이후 저녁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자매님은 드시는 둥 마는 둥, 식탁 위에 잔뜩 사진을 늘어놓으시며 혼잣말처럼 기억을 더듬으셨습니다. 간혹 기억이 안 나실 때에는 사진 뒤에 적힌 장소를 찾아보셨고, 사진 속 순례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당시의 분위기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시던 중 성당 뒤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형제님 사진을 보시고는 무릎을 치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형제님 기억하지? 혼자서 순례를 왔기에 의아했는데, 자매님이 암에 걸려서 직장도 그만두고 10년 넘도록 수발을 하셨다더라고. 결국, 자매님을 하느님께 보내드리고 순례를 온 거래. 울기도 많이 우셨지만, 순례 마지막 즈음에는 많이 밝아지셨었는데…. 그나저나 내가 선종한 자매님을 위해 매일 주모경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는데, 한 달도 안 돼서 잊어버렸구먼. 나이가 드니까 이런 걸 다 잊게 되네. 이 사진을 보니 생각이 나. 정말 다행이야. 사진을 기도서에 넣어두고 꼭 기억해야겠어.”
사실 순례 중에는 사진 찍는 것에 너무 열중하신 자매님께 잔소리도 좀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순례자 한 분 한 분을 기억하고 되짚어보는 자매님을 보면서, 그 모든 추억을 되살리는 사진 한 장이 자매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일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잊고 지내던 소중한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앨범이나 핸드폰 속에 남겨진 사진 한 장을 다시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순간을 다시 살게 되는 듯합니다. 어쩌면 순례라는 것도 그와 비슷할지 모릅니다. 순례가 끝나면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이따금 돌이킬 때마다 그때의 감사와 사랑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치 순례의 이야기를 하나씩 모아오신 듯 사진 뭉치를 가방에 다시 넣으며 환하게 웃으시던 자매님의 모습이 지금껏 생생합니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