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의 종교적 신념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태도가 정서적 불안과 함께 신체화 증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와 해방을, 병자들에게는 영육간의 치유를 주시는 생명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경증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실비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거나, 아니면 생활에 잘못 적용함으로 인해 문제를 갖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비아는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계모는 실비아의 양육보다는 오로지 집안일을 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밥 짓는 일부터 시작하여 빨래와 청소 그리고 의붓동생을 돌보는 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집안일은 실비아에게 도맡겼다. 실비아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계모가 시키는 일을 온전히 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체벌과 가혹한 학대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실비아에게 이런 삶의 고통을 이겨낼 힘은 오로지 신앙밖에 없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곧바로 계모에게 적용되었다. 실비아는 계모의 말에 순종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곧 사랑의 실천이며 동시에 못다 한 친어머니를 향한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계모 밑에서 겪는 혹독한 시련들은 의미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계모가 아무리 힘든 일을 시켜도 불평불만 없이 기꺼이 감내할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웃(계모)을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다 보니 자신을 사랑한다는 개념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인이 되어 실비아는 집을 떠나 독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부터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심리정서적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는 삶의 방식이 사회의 대인관계에서는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처럼 자신보다 남을 더 우선적으로 돌보며 배려했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은 언제나 공허하고 무기력한 마음뿐이었다. 실비아는 어린 시절 기능했던 삶의 신념과 종교적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자신이 보호받을 길은 없는지 그 방법을 알고 싶었다.
상담을 통해 실비아는 타인을 먼저 돌보는 사랑의 실천 없이도 하느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실비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이 계모의 말을 잘 따라야만 그나마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삶의 경험이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잘 섬겨야만 한다는 무의식적 신념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먼저 챙기는 것이 자유로운 기쁨이 아니라 강박적인 의무로 다가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상담 과정에서 실비아는 수십 년 동안 억압됐던 계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그 어떤 종교적인 수치심이나 죄의식 없이 모두 쏟아낼 수 있었다. 그동안 계모를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자신의 느낌을 억압하고 있었던 실비아는 감정이 정화되고 환기된 이후에야 비로소 상처 입은 자신을 온전히 안아줄 수 있었다. 또한, 계모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실비아는 계모를 마음으로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점차 자신과도 화해를 시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이웃 사랑은 공허한 자신의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충만해진 자신의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라틴어 속담에는 “아무도 받지 않고서 남에게 줄 수 없다(Nemo dat, no quod habet)”는 말이 있다. 여기에 사랑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영성심리학자, 성필립보마을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