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성지 순례단이 이탈리아 밀라노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바로 얼마 전에도 가방 1개가 분실되어 일주일 동안 고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단 한 개의 가방만으로도 큰 고생을 했는데, 무려 24개나 되는 가방이라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지요. 더구나 스위스에선 이틀만 머문 후 이동할 예정이라서 마음이 더욱 다급했습니다. 하지만 A 항공사 직원은 무성의한 표정으로 ‘본사에서 가방의 위치를 확인 중’이라며 아직은 알 수 없다고만 했습니다.
호텔로 이동한 후 가이드가 방을 배정하는 동안 저는 당장 필요한 칫솔과 치약을 샀고, 방 열쇠와 함께 나눠드리며 고개 숙여 사과드렸습니다. 그런데 대표 자매님께서는 아주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미카엘씨가 잘못한 게 아닌 걸 알아요. 편의점에 가신 사이에 저희끼리 이야기 좀 했어요. 짐을 받으신 네 분께서 먼저, 나누어 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나누어 쓰자고 제안을 해주셨어요. 게다가 우리는 지금 순례 중이잖아요. 이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해도 보통의 여행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례단 전체가 같은 층을 사용했던 그 날 밤, 복도는 아주 늦게까지 소란스러웠습니다. 몇 개 되지 않는 화장품과 드라이어를 차례로 받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정의 첫날이라 몹시 피곤하셨을 텐데도 자매님들께서는 오히려 삼삼오오 모여서 순서를 기다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차례로 순서를 불러주시는 구역장님의 밝은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다들 똑같은 화장품과 립스틱을 바르고 나가면 너무 촌스럽게 보이는 것 아닌가, 혹시라도 신부님께서 구분을 못 하시면 어떡하느냐”고 하시자 다 같이 깔깔 웃기도 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즐거운 분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뜻밖에도 제게 가방의 행방에 관해 질문하는 분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매님들께서 가이드와 인솔자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궁금해한다고 해서 가방을 빨리 찾는 것도 아니니 누구도 그에 대해 묻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날은 루체른 시내를 둘러본 후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융프라우’를 오르는 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이드와 저는 아침부터 십여 분 간격으로 항공사와 연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수십 통의 전화를 한 끝에야 분실된 여행용 가방들이 스위스로 이송 중이며, 저녁때까지는 우리가 묵을 호텔에 배송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24개의 짐 중에 1개는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만 없는 것을 탓해야 하는지, 나머지를 다 찾은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복잡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말씀드리자, 순례단은 몹시 기뻐하시면서도 ‘설사 내 가방이 빠졌다고 해도 불평하지 말자’고 서로 다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머지 가방 하나도 곧 도착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가방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숫자를 세어보니, 황당하게도 가방은 24개였습니다. 항공사에서 가져온 인수장에는 여전히 23개라고 적혀 있었더랬지요.
일정이 마무리되고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매님 한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여행을 많이 다녀봐서 이런 일을 몇 번 겪었어요. 그런데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요. 공항에서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잠시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모두 서로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고 하고, 나의 불편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이 공동체에 속해있어서 다행이라는 뿌듯함을 느꼈어요. 어제 가방을 받은 자매님 네 분이 제일 늦게 씻으신 건 모르셨죠? 오늘 시내를 다니면서 몇몇 분은 화장품을 여러 개 사셨는데, 혹시 며칠 간 가방이 못 올 수도 있다면서 다들 나눠 써야 하니 ‘제일 무난하고 트러블이 안 생기는 것’을 찾으시더라고요. 자신이 쓰는 화장품을 고르시는 게 아니라요. 내일부터 본격적인 순례가 시작될 텐데, 저는 이번 일정이 정말 기쁘고 풍요로울 것이라 믿어요. 결국 순례는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하잖아요?”
너무나 당연하게도, 순례는 어느 때보다 기쁘고 행복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감히 예상하건대, 그 순례의 진정한 열매는 여정을 함께한 서로가 아니었을까요? 사실 순례는 떠남 그 자체가 아니라, 이후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가지고 그 삶을 함께 헤쳐나갈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큰 축복은 아마 없겠지요. 내 주변 사람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그럴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며 새해 첫 달을 살아가야겠습니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