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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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45. “오소서 성령님!”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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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거리에는 하나둘씩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 음식점마다 활기를 띠고, 가게 앞까지 테이블이 나와도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이 늘고 있다. 이른 저녁부터 퇴근 버스를 꽉 채웠던 사람들은 도심 속 거리를 채우고 있다. 전화조차 소곤소곤 받던 사람들이 이제는 상기된 목소리로 대화도 나눈다. 이렇게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이 정말 컸기 때문에 왠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다.

날씨가 끄물끄물해서 비 소식이 있나 일기예보를 봤더니, 한반도의 지도 전체가 짙은 황토색으로 그려져서 ‘가뭄 심각’으로 표현되었다. 짧은 비 소식이 있으나, 해갈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코로나19의 위기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너무도 빨리 돌아가고 있다. 기후위기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금 당장 우리와 상관없는 것처럼 어이없는 선택을 하고 있다.

요즘 나는 나 스스로 생각해도 정서적으로 산만하게 느껴진다. 이른 새벽 눈을 뜨는 것이 습관이 되어, 무릎 꿇고 십자가를 응시하지만,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엊그제 만난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이동우씨의 아내 권금희씨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온 같은 아픔을 가진 많은 아픈 얼굴들이 떠오른다. 원전 재개를 말하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 침묵으로 탈핵, 탈석탄을 외치는 거리의 순례단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리는 평화로를 찾아와 “우리가 이 역사를 기억할 거예요”라고 외치는 중고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쳐가는 많은 이들과 또 자본의 논리로 목숨값을 흥정하거나, 이 위기의 시대에 아직도 ‘발전과 개발’을 외치는 선거후보들을 향해 손뼉을 치고 있는 장면은 ‘우리가 정말 하느님 모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맞는가?’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땅의 울부짖음과 아픈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마치 지혜로움인 것처럼 행동하는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코로나19가 시작되었을 때보다 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틀 전 임종을 준비하시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병원을 다녀왔다. 아버지께서는 “빨리 가고 싶은디, 안 부르시네”라고 말씀하셨다. 병자성사 중에 아주 작게 부순 빵을 받아 모시며, “내가 다시 성체를 모실 수 있다니” 하시며 정말 기뻐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아버지, 아무리 작은 빵이라고 해도 예수님이에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예수님이지”라고 대답하셨다. 고통스러운 숨을 쉬시면서도 끝까지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근차근 임종을 준비하시는 아버지를 뵈며, 그 어떤 물질로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느낌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인내가 간절하게 필요해 보인다. 우리 같은 어른들이 정말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물질을 마음껏 누리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좀 더 참을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세례로부터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불안한 현실에서 불편한 마음이 있는 가운데 올바른 선택으로 희망을 찾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모두 세례 때에 성령을 받았다. 뽑기 하듯이 나에게 오시는 성령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났다. 생명 길에 이르도록 재촉하시는 성령이 느껴지는가? 그러면 우리가 지금 느끼는 마음의 불편함을 받아 안고 담담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소서 성령님!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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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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