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눈물을 너무 참다 보면 울고 싶을 때에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요즘 날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하늘이 비를 참으면 장마 때가 되어도 비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걱정이다. 그런데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말라가던 풀밭에 스러져가며 서로 뒤엉켜 있는 풀들처럼 사람들도 목말라 보였는데, 비가 내리고 나니 풀도 사람들도 생기를 되찾았다. 우리가 들판의 풀을 보듯 우리가 사는 우리의 세상을 조망하여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들판의 풀들보다 귀하게 만들어졌어도 우리는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의 손에 의해 세상에 존재하게 된 피조물 가운데 하나임을,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 땅과 비와 바람과 햇빛을 그리워하고 그들과 함께할 때에 생기를 되찾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각으로부터 너무 멀리 걸어 나와 버린 듯하다.
얼마 전 ‘생태적 삶’에 대한 주제로 강의하면서 나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빚으셨고, 또 우리의 머리카락도 헤아리실 만큼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손상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라고 말하니, 한 자매님이 이렇게 질문하셨다. “하느님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왜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지 않으시지요?” 언뜻 생각해보면 정말 “왜?”라는 질문이 맞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 삶 어떤 언저리에서 한 번쯤 하느님께 던져본 질문일 수 있다. 정말 하느님께서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지 않으시는 걸까? 하느님께서는 항상 옳은 길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동의 없이 우리를 억지로 질질 끌고 가지 않으시고, 옳은 길로 부르시지만, 응답을 드리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존중해주시고 기다려 주신다. 항상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계시지만 응답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임을 믿어주시고 기다려 주시는 것이다. 나는 이런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세상 그 어떤 억압도 깨뜨릴 수 없는 정말 큰 ‘자유’를 느꼈다. 아마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기꺼운 응답에 나타나는 ‘자유’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어머니가 제 자식을 팔에 안고 젖을 물리며, 무릎 위에서 귀여워하듯’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지만 젖을 빨아보지도 않고 배고픔에 원망하며 울고 앉아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이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불러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이지, 우리를 무조건 좋은 데로 끌고 가주시라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 하느님은, 아들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조차도, 그분을 살리실 수도 있으셨지만, 오히려 그분의 자유를 손상하지 않으시면서 기다리셨다. 우리는 어쩌면 ‘십자가 없는 아주 평탄한 길만 걷게 해 주셔야 당신을 정말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습은 ‘하느님 당신은 제 뜻대로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강요하고 있어 보인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67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나는 자주 이 말씀을 되새기려 한다. 왜냐하면, 순간순간 생각과 행동 중에 하느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당신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복종’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이렇게 강조하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너무도 쉽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축소하려는 우리의 경향성을 짚어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저마다의 길로 이끌어주신다. 진정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