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가끔 도심에서의 여름 한낮이 왠지 너무 과한 화려함, 마치 어울리지 않는 분장을 한 것처럼 일그러진 모습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편리함과 풍족함을 가져다 놓았지만 딛고 있는 땅은 쩍쩍 갈라진 광야의 민낯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라리 발밑을 보지 않으려는 듯, 끊임없이 대체재를 찾는 모습이다. 그 속에 나도 서 있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 중에 길을 걷다 보면, 등줄기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다행인 것은 이렇게 땀이 흘러도 수도복은 정말 말짱해 보인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한여름인데 더운 날 볕에서 일하고 계실 농부님들과 또 노동하시는 분들을 기억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의 모든 일상은 정말 많은 분의 수고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른 새벽 눈을 뜰 때 즈음에, 열린 창문으로 들리는 새벽 배송 자동차 소리, 분리된 쓰레기를 거둬가는 자동차 소리가 나에게는 알람과도 같이 다가온다. 그렇게 이른 새벽부터 누군가는 이미 뛰기 시작했고,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일이라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연결된 누군가를 위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이 나를 침대에서 일어나게 만든다. 이러한 생각으로 촛불을 켜고 장궤했을 때에 도심의 이 모든 소리는 소음이나 분심이 될 수가 없었다. 매일 출근길에 버스를 타며 살펴보니 전날에 정류장에 수북이 쌓여 있던 쓰레기를 치우는 손길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가로수마다 영양제 주머니가 달린 것을 보니, 이들을 돌보는 손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새소리의 아름다움과 들풀의 향기가 정말 그립지만, 나는 이 도심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였다.
많은 분들께서 도심에서의 생태적 삶에 대하여 묻곤 하신다. 그러면 나는 생태는 다름이 아니라, 이 모든 관계성, 연결됨을 깨닫는 것이 바로 ‘생태’라고 말하곤 한다. 나를 위한 배려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감사드릴 수 있을 때에,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을 때에 지키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에는 광화문에서 기후행동을 했다. 형제, 자매님들과 수녀님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침묵 속에서 기후위기를 외치고 있을 때에, 우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무리를 지어와서 횡단보도 끝에 서 있는 나와 다른 수녀님을 에워쌌다. 그들은 “수녀들아, 정신 차려라. 지금 기후문제가 그렇게 중요하냐? 왜 이렇게 한심하냐? 이 나라가 차별금지법으로 동성애를 지지하면 아이는 누가 낳냐? 동성애 같은 거 찬성하고 그러면 악마야, 악마!”라고 하면서 귀에 대고 악을 쓰다가 나중에는 삿대질까지 하였다. 어떤 말로도 그들을 이해시키거나 진정시킬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차렸고, 차라리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이 상황을 보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표정들이었다. 결국, 무리는 다른 쪽으로 건너갔는데, 그들의 등에는 ‘Jesus Army’라고 쓰여 있었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무리에 속한 여러 사람들의 손에는 카메라와 셀카봉이 들려 있었고, 그들은 제각각 실시간으로 방송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 슬픈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돈이라는 우상”을 향하는 무리를 알아보게 만들었다. 무엇이 중요한지는 생각하지 않고, 가치관이나 어떤 신념도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례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들 앞에는 항상 ‘물신’, 곧 돈이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 눈에 드는 것이 좋은 몫이었다. 또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눈에 들고, 그분 말씀을 듣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몫이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지혜를 다하여” 이 몫을 살아야 한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