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끝에 내린 비라서 흙이 있나 싶은 곳에는 초록색 풀이 무성해졌다. 다 말라버려 죽은 듯해 보였는데, 초록색 팔을 뻗쳐 저 살아 있음을 찬미하고 있다.
몇 년 전 가뭄이 너무 심했을 때, 빗물 저장고에 있는 물을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대주었으나 너무 장기적 가뭄이 되자, 작물들이 제 줄기나 가지를 더는 뻗지 않고, 그저 이미 생긴 모양만 유지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고구마도 마찬가지로 줄기를 키우지 않으려는 듯해 보였다. 그런데 신기한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군데군데 고구마 줄기들에 보라색 꽃이 피어 있었다. 보라색 나팔꽃처럼 생겼기 때문에 고구마밭에 나팔꽃 씨앗이 뿌려졌었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팔꽃 넝쿨은 없었고, 자세히 보니 고구마 줄기에 꽃이 피는 것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 고구마 꽃은 흔하게 피는 꽃이 아니라서, ‘100년에 한 번 피는 희망 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 흔하지 않은 꽃이 우리 밭에 피었으니 왠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밭을 돌보며 고구마를 직접 관상하는 동안 고구마 편에서 생각해보고 금세 알아차린 것은, 이 꽃은 그저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단순한 ‘희망’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꽃은 오히려 처절함과 절실함, 간절함을 노래하고 있어 보였다. 마치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라도 먹으려는 강아지들의 절실함과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간절함과 같은 그 부르짖음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가뭄 때문에 땅이 마르면 열매가 땅속에서 자라기 힘들어서, 오히려 꽃을 피워 씨앗으로라도 번식하려고 하는 것이 순리라고 지나가시던 어르신들께서 고구마 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본능에 따라 번식을 위한 다른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작물에게 물을 적당히 주지 않아서 그렇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적당한 물을 준다 해도 위로 내리쬐는 햇볕과 그 온도, 바람은 날씨가 아닌 기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기후가 변해가는 것에 작물이 살아남을 대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꽃을 피우는 고구마를 보고 절실함과 간절함을 볼 수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러한 ‘간절함’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얻을 수 있고,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간절하지 않아도 된다. 위기에 직면하고, 간절하게 구하지 않아도 되니 우리 감각 안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대신 우리는 취해지지 않으면 대체재를 찾고, 피하거나 탓하고, 아닌척하거나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화내거나 차라리 포기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포기는 죽음, 곧 자멸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얼핏 보기에 간절함이 없는 것은 그저 다음으로 미룰 수 있는 ‘신앙의 문제’ 정도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것은 생사의 문제이다. 간절함은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간절함은 다음 세대를 기억하는 이에게 일어난다.
아,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정말 오만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위험을 무릅쓰고 ‘핵’을 찾으며, 아무 문제 없다는 듯 “Why not?” “왜 안 돼?”라고 말하고 있으니, 자기 본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감각을 잊은 채로 다음 세대마저 절망의 문으로 초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후가 변하자, 고구마가 뿌리를 키우던 자기 습성을 내려놓고 꽃을 피워 씨앗을 여물게 한 전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의 인식과는 다르지만 고구마에 일어났었을 간절함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제 몸 살찌우려고 했던 고구마는 손 마디만 한 열매로 버려지기에 십상이다. 이제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드는 그 일을 우리가 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의인 쉰 명에서 열 명으로 낮춰서라도 살리고 싶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가 있다 한들, 그 의인 열 명 중 한 사람으로 우리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버려진 고구마처럼 되기에 십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약한 우리라도 간절하게 성령을 청할 때에 위기를 극복할 지혜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소망!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