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59. 생명의 그물망 속에 있는 우리
코로나로 일주일간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무르익어가는 가을 정취가 나무에서, 풀잎에서, 바람 냄새에서 묻어나온다. 다른 모든 생명의 배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감사함에 팔을 벌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나니, 이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된 마음이다. 내 손가락 끝에 난 상처 하나에도 온몸이 반응하여 아물게 하듯이, 이 땅에 거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든 아픔에도 지구의 모든 생명이 함께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보면, 아파하는 사람들과 생명에 대하여 무관심한 우리네 굳은 마음은 본래의 자생력을 잃어가는 이 지구의 취약한 부분들일 것이다. 어떻게 이 부분들이 다시 본래의 연결된 자생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미 굳어버린 살점이야 잘라낼 수 있다지만, 살보다도 더 예민하게 연결된 생명의 관계는 잘라내고, 죽도록 놔두면 자신도 함께 죽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알고 지내는 수녀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사진 가득 초록빛 벼가 담겨있었다. “벼 이삭이 패었어요!”라는 기쁨의 탄성과 함께 보내온 사진을 보며, 나도 함께 기뻤다. 농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농부 수녀님이 모내기해 놓고는 가뭄과 장마에 애간장을 녹여가며 돌본 벼에 이삭이 팬 것을 발견한 것이다. 수녀님은 세상 모든 것을 얻은 사람처럼 잔치를 벌일 것 같은 기쁨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지난해까지의 내 모습을 기억하며, 내심 흐뭇한 마음으로 수녀님에게 축하 메시지를 띄웠다. 이제 생명의 신비에 또 다른 방법으로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한 축하였다. 이 수녀님은 이제 다른 생명이 내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로가 찬미하도록 하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와는 다른, 마음이 답답해졌던 일이 떠오른다. 며칠 전 한 본당 미사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정말 잘 정돈된 예쁜 성당이었다. 어느 한구석도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깨끗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예쁜 성당에 앉아계신 신자분들이 몇 분 안 계셨다. 게다가 연로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사가 시작되자 예쁜 성당에 걸맞게 TV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로 해설과 독서가 봉독되었다. 또 미사 중에 신부님께서는 미사 경문의 좌우 교송에 너무 예민하신 나머지 ‘합송’이 잘못되면 다시 연습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렇게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뭔가 착잡함을 느꼈다. 미사에 참여하고도 성찬의 신비에 참여했다는 기쁨이나 말씀의 신비 안에서 우리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는 기쁨은 잊은 채로 맥없이 걸어 나오는 자신과 또 신자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여기가 바로 교황님이 조심하라고 권고하셨던 ‘박물관 교회’구나!”라고 되뇌게 되었다.
깨끗하고 예쁜 성당 안에 단정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삶의 고뇌와 찬미가 없어 보이는 이 교회는 왠지 우리네의 아픈 삶의 이야기와 지구 공동의 집이 하루하루 겪고 있는 시급한 위기에 대한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이야기는 그저 한 성당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와 나 자신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기도 안에서, 그리고 나의 관계 안에서, 또 나의 밥상머리에서, 나도 어려운 이야기는 피하고, 신앙을 고상한 언어들로 고백하며 박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벼 이삭이 패었다고 기뻐하는 친구 수녀님의 감탄이 우리가 잃어버린 ‘자생력’을 되찾게 해줄 것이다. 생명과 관계하는 사랑만이 우리 입술의 감탄을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가 되게 할 것이다. 하느님의 당신 백성에 대한 애끓는 사랑에 감사드리며 빵을 나눌 때에 우리는, 외적인 조건들보다 모든 이의 삶을 포옹할 수 있게 되며 저마다 길이 바로 복음의 현장이 되게 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이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