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의 빛을 보고 길을 찾듯이, 혼돈과 불확실성 속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가 진리의 길을 보여주고 희망의 빛을 비춤으로써 삶에 위로와 힘을 주기를 고대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과 행동으로 온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모두 함께 올바른 길을 걸어 삶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많은 신자분이 부담스러워 하십니다. 나도 주님에 대해 잘 모르는데, 나도 똑바로 살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인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들 중에도 그분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던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거나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으시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복음 선포의 소명을 맡기십니다. 그런 불신과 두려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약함과 부족함이 누군가에게는 ‘너도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격려하고 부추기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대단하고 특출난 사람이라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길을 ‘먼저’ 걸으며 수많은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경험해본 ‘선배’로서 그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겁니다. 신앙의 기쁨을 먼저 맛본 사람으로서 그게 어떤 맛인지, 어떻게 해야 그 맛을 더 제대로 느껴볼 수 있을지를 알려줄 수 있는 겁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내 안에서 시들어버리듯, 드러내고 전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이라는 결실을 보지 못하고 악한 세력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교하라 하십니다. 당신께서 말씀과 기적으로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사랑의 계명을, 구원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모범과 선행, 자선과 나눔, 용서와 이해, 배려와 존중이 사람들을 이끄는 이정표가 되어 그들이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보고 따르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전교는 어려운 신학지식을 앵무새처럼 떠들어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 ‘붙여넣기’ 해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안에서 느낀 행복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그분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삶으로 선포한 복음을 보는 이들이 받아들이고 따르면, 내가 먼저 걸은 신앙의 길을 그들도 함께 걷게 됩니다. 그렇게 모두가 함께 ‘주님의 빛 속에 걸어’(이사 2,5)가게 되면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지붕 아래로 모여들어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때에는 서로 대립하거나 싸울 일도, 상처 입거나 슬퍼할 일도 없을 겁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모두가 깨우치고, 그 안에서 위안을 받으며, 남을 해쳐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썼던 것들을 모두를 살리고 함께 행복하기 위해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전교해야 할 공동체적 이유입니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결실을 보기 위해 전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내 모습을 보고 위로와 힘을 얻은 이가 없다면, 나는 아직 열매 맺지 못한 신앙인입니다. 길가에 심어진 가로수도 열매를 맺는데, 주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고 안타까워하실까요?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내 취향과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일을 좋아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점점 커질 겁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