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22)낙엽을 밟으면서
‘추풍낙엽’의 계절이다. 우리는 통상 이 말을 권력을 잃거나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다는 부정적 의미로 쓴다. 하지만 나무나 낙엽의 편에서 보면 오히려 제때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다하고 몸담았던 숲의 비옥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매우 거룩한 헌신이다. 나뭇잎은 나무가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만드는 공장의 역할을 한다. 지난번 단풍이란 주제에서도 말했듯이 잎의 엽록소는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과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가지고 햇빛을 이용해 나무가 자라는 데 필요한 포도당을 만든다. 이를 광합성 작용이라 한다.
계절이 바뀌어 낮이 짧아지고 기온이 내려가면 스스로 나뭇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층을 형성시켜 낙엽이 된다.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고도의 연출이 빚어낸 정밀한 작업이다. 먼저 녹색의 엽록소가 잎자루와 가지 사이의 좁은 통로로 이동한다. 그러면 잎은 녹색을 버리고 고유의 색으로 변신한다. 그러다가 떨켜층을 형성한 이파리는 자신의 무게만으로도 꺾여서 가지에서 떨어진다. 나무 한 그루가 1년 내내 간직했던 나뭇잎을 모두 떨구는 데는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는다. 추워지는 날씨에도 한여름같이 잎이 가지에 붙어 있으면 나무는 뿌리에서 수분을 공급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낙엽은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기에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떨어뜨리는 지혜를 발휘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낙엽들은 녹색 잎으로 나뭇가지에 붙어 온 힘을 다해 일했다. 이뿐이 아니다. 잎은 우리 인간에게도 유익한 먹거리와 의약품의 원료가 되어준다. 다양한 종류의 차들은 대부분 나뭇잎을 가공해서 상품화된다. 은행잎은 혈액 순환 개선제를, 주목의 잎에서는 ‘택솔’이란 암 치료제 원료를 추출한다.
가을 낙엽을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독자라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란 수필이 먼저 떠오를 듯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로 시작되는 이 수필은 낙엽이 타면서 나는 냄새와 우리의 삶을 기막히게 표현하였다. 요즘은 어디서나 낙엽을 태우는 광경을 볼 수 없다. 정말 오래전에 맡았던 그 냄새인데도 아직도 코에 와 닿는 듯하다.
낙엽이 쌓인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촉감이 너무 좋다. 매일 포장된 아스팔트 길과 콘크리트 건물 바닥을 걷던 발이 부드러운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호사를 누린다. 그래서 이맘때쯤 나는 낙엽이 쌓여 있을 만한 호젓한 길을 일부러 찾아 걷기도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한적한 길 하나 정도는 쌓인 낙엽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도 좋겠지만, 요즘은 낙엽을 치우는 일도 기계로 바람을 일으켜 청소하기에 그런 길을 찾기도 힘들다.
오늘 숲길에서 내가 밟은 낙엽은 이제 훗날 자기 몸을 썩혀 비옥한 흙으로 변신할 것이다. 땅에 떨어져 사라져가면서도 후세의 숲에 거름이 되는 살신성인의 모습을 우리는 낙엽에서 볼 수 있다. 이제 따듯한 봄이 되면 이 낙엽이 준 땅의 비옥함으로 커온 나무는 가지에서 다시 새잎을 내밀 것이다. 낙엽을 밟으며 나는 이렇게 자신의 때를 알아 아름답게 퇴장한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행로는 정해져 있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단 한 번만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생의 각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 있고, 노년은 원숙하다. 이 특징들은 제철이 되어야 거둘 수 있는 자연의 결실이다.” 낙엽은 우리에게 이 삶의 지혜를 되새겨 보게 한다.
신원섭 라파엘
충북대 산림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