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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64. 월동 준비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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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구석진 길가에 올라온 풀도 마치 화기(花器)에 담긴 꽃처럼 소중하게 다가온다. 생명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어 초록색 옷이 갈색이 되어도 보기에 좋기만 하다. 꽃꽂이해 놓은 듯 탐스러운 강아지풀과 수크령이 바람 불 때마다 제 몸을 흔드는 게 예쁘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모든 것이 문득 다시 생각해보면 함께 살 수 있어 복되게 느껴진다.

가을에는 더욱더 추억에 젖게 된다. 아무래도 내 몸이 기억하는 가을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어린 시절 초가을부터 아버지께서는 겨울을 날 땔감을 준비하셨다. 지게에 장작용 나무를 지고 가실 때에 나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가며 나름 큰 나뭇가지라고 생각했던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내 눈에 아버지의 지게는 너무 크고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나에게 아버지는 더 크고 힘센 분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뒤뜰에 다 와서 지게를 내려놓으실 때 아버지의 젖은 등을 보며 나는, 내가 지게를 대신 질 수 있는 나이가 빨리 오기를 기도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가져온 나뭇가지들을 보시며 “울 애기가 불쏘시개를 잘 골라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한 아름도 안 되는 가지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지만은 아버지의 말씀은 내가 아버지께 도움이 되었다는, 꼭 필요한 일을 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가을부터 겨울을 날 월동 준비를 할 때에 시골에서 땔감을 준비하는 것은 정말 큰일이었다. 우리는 산에 쓰러진 나무와 썩은 나무들을 골라 땔감으로 사용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쓰러진 나무를 정리해주면 숲이 고마워할 거여. 우리는 땔감을 마련하고 숲은 정리가 되니께 서로 좋은 거지. 알고 보면 서로 기대며 사는 거여.” 정말 그랬다. 아버지께서는 소나무들을 점령해버린 칡넝쿨을 낫과 갈퀴로 끌어내려 숨통이 트이게 만들어 주셨다. 그러면 나무가 말끔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월동 준비로 땔감을 마련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가을이 되면 오빠는 매일같이 학교에 가기 전, 새벽에 산으로 올라가 상수리와 도토리를 가마니에 주워 와서 뒤뜰에 부어놓았다. 뒤뜰이 온통 도토리로 가득해지자 오빠는 그 위에 나무 썰매 두 개를 올려주며, 나와 막내 언니에게 자주 가서 타라고 이야기했다. 동글동글한 도토리, 상수리 위에서 썰매 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겨울철 빙판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타다닥!’ 썰매 밑에서 상수리껍질 부서지는 소리가 재미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부서진 상수리와 도토리만 골라서 그것으로 묵을 만드셨다. 어머니께서 어렵게 일하실까 봐서 오빠가 생각한 방법인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막힌 방법이다. 이렇게 월동 준비는 우리에게 온 가족의 일이었고, 삶이었다.

모든 것이 간소화되고 편리해진 오늘날에는 이러한 불편이 무의미해 보이지만, 자연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가 ‘바보들’처럼 보인다.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누가 우리를 숨 쉬게 해주는지도 모르는 ‘바보들’이다. 엄청나게 공부하고 대단한 학위를 받아도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배울 수 없다면 헛배운 것이다. 내 부모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워온 ‘시골살이’에는 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면 이러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오른 자캐오를 알아봐 주신 것으로, 자캐오는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싶어 한다. 지금은 우리 마음의 월동 준비를 할 때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시는 소리에 귀 기울일 때이다. 자캐오는 우리에게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맞이하고, 그동안 소홀했던 자연과 이웃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인의 월동 준비!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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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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