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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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완벽한 겸손과 완전한 너그러움 본받아야

[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17. 너그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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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모님을 닮아 그 완벽한 겸손과 너그러움을 갖추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 【CNS】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저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요. ‘지옥철’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 틈 사이에 겨우 몸을 싣고 끼어 갈 때가 많은데요. 조금만 한 걸음씩만 안쪽으로 들어가 주면 더 많은 사람이 탈 텐데요. 그 한 걸음을 움직여주지를 않네요. 지하철 안 입구에서 둥둥 떠 있는 기분으로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서 있게 되는데요. 그때 누군가 들어오려고 하면 참 당황스럽지요. 그때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봤어요. 그랬더니 한 사람이 쏙 들어오더라고요. 그저 몸의 방향만 틀었을 뿐인데요.

사실 일상에서 타인에게 베푸는 배려란 이렇듯 아주 자잘한 것인데요. 언제부턴가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일에 무심하게 살아가는 저 자신을 보게 돼요. 그러나 또 지나치게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을 보면 꽤 부담스럽고요. 현대 심리학에서는 지나치게 베풀고 양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존감이 낮을 수 있다고 해요.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에서 유능감을 맛보면서 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행동이며 착한 사람 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그 어느 때보다 배려하고 양보하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것 같은데 진짜 너그러움이 어떤 지점인지 헷갈리네요. 성인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인의 지혜를 구하는 김 수녀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

너그러움은 필요하고 좋은 덕이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 않느냐는 질문인가요? 글쎄요. 좋은 것은 넘쳐 흘러도 좋지 않나요? 아마도 지나쳐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일단 낮은 곳에서 작게 피는 제비꽃 같은 미덕, 너그러움에 관해 이야기할게요. 겸손은 온전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면요. 너그러움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당당함인데요. 그런데 겸손과 너그러움은 연리지처럼 서로에게 영양분을 나눠주는 덕이에요. 다른 듯하지만 하나이죠.

너그러움의 본질은 겸손에서 나오고 겸손은 너그러움으로 표현돼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 여기서 끝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요. ‘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는 너그러움도 여기서 끝나면 정말 오만한 거고요. 그래서 겸손은 말해요. ‘하지만 나의 능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야.’ 그리고 너그러움은 이어서 말하지요. ‘그래서 난 못할 것이 없어’라고요.

겸손은 과도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너그러움으로 자신감을 찾아요. 내가 지닌 것, 내 것이 아니지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마땅히 존중받고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확신인데요. 제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이라도 아주 작은 흠집으로 손상되기도 해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뇌에 아주 작은 장애가 생기면 모든 지식을 잃고 말겠지요. 그런데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잠시 빌려온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는다면 소유할 때나 잃을 때나 달라진 것은 없겠지요.

물론 누구나 살다 보면 낙담과 슬픔에 시달릴 때가 있어요. 그리고 무기력증으로 ‘난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하면서 자신에 빠지게 되는데요. 난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생각에는 오로지 ‘나’밖에 없어요. 반대로 ‘난 꽤 좋은 사람이야!’ ‘난 당신에게 필요한 것 다 해줄게’라면서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해요. 거기엔 오로지 ‘너’밖에 없을 테고요.

사실 진실로 너그러운 사람은 의심이란 것이 없어요. 너그러움은 슬픔도 무거운 짐도 건조함도 달콤함도 부드러움도 모두 품을 수 있어요. 이러한 너그러움이 없는 겸손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거짓이에요. 물론 겸손이 없는 너그러움은 주목받고 싶은 자기과시에 머물 수 있고요. 관대함과 겸손의 결합만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성모님은 고백하는데요. 천사가 성모님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신다는 특별한 메시지로 상상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해 주었어요. 그런데 성모님은 즉시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하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신앙고백을 해요. 여기에서 성모님은 완벽한 겸손과 완전한 너그러움을 보여줘요. 나는 가난하고 부족해서 할 수 없지만 전능하신 주님의 뜻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고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는 당당한 용기지요.

정리하자면 지나치게 남에게 베푸는 사람은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요? 착한 사람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왜 그럴까요? ‘내가 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었다’ 그러니 ‘너도 해줘’라는 무의식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서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해주셨어’라고 한다면 베푼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줄어들겠지요. 그러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요? 진짜 너그러움은 겸손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줘요!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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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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