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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성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11월 17일)

1207~1231년, 독일 튀링겐 영주의 아내, 작은형제회 제3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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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벳 성녀는 헝가리의 국왕 앤드레 2세와 왕비 제르트루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녀가 네 살 때 독일 튀링겐의 영주 헤르만 1세는 사절을 보내 성녀와 자신의 맏아들 헤르만과의 정혼을 제의했습니다. 이는 교회와 갈등을 빚고 있던 독일의 오토 4세에 맞서 정치적인 연대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성녀는 얼마 안 되어 튀링겐의 궁정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화려하고 세속적이며 호사스러운 궁정 생활 속에서도 성녀는 깊은 그리스도교의 신심을 간직했습니다. 늘 기도하는 걸 좋아했고, 경건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녀는 갖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1213년에는 어머니가 헝가리 귀족들로부터 살해를 당했고, 3년 뒤에는 결혼하기로 약속한 헤르만이 숨졌습니다. 그러자 헤르만 1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루트비히와 성녀를 다시 약혼시켰습니다. 타국에서 많은 시기를 받으며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나마 약혼자인 루트비히는 성녀를 보호하며 울타리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될 소피아도 친어머니처럼 대해주었다고 합니다.
 

헤르만 1세는 교회를 등지고 정치적 야망을 좇다가 1217년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트비히 4세는 14살인 성녀와 결혼했고, 그들은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모범적인 부부였습니다. 1221년 작은 형제회가 독일에 정착했을 때 성녀의 삶은 큰 변화를 겪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상에 큰 감동을 받은 겁니다. 이에 성녀는 작은형제회가 아이제나흐에 수도원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튀링겐에 홍수와 기근뿐만 아니라 전염병이 창궐할 때도 성녀는 남편을 대신해 나라 곳곳에 자선금을 나누고, 심지어는 관리들의 옷과 귀금속까지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서도 그의 유산의 상당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왕족의 이런 행보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독일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녀가 된 이유입니다.
 

성녀는 1228년 아이제나흐로 가서 작은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마크부르크에 ‘성 프란치스코의 자선 병원’을 세우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불과 24년밖에 살지 못하고 선종했지만, 성녀는 오늘날 작은형제회 재속회의 수호성인으로 높은 공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녀의 영성 지도신부였던 콘라드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성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 기도를 마친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나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성녀가 선종한 뒤에도 그의 무덤에서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시성 절차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그레고리우스 9세 교황은 1235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성녀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14세기 이후 교회 미술에서 성녀는 망토에 장미꽃을 담고 있는 모습으로 종종 그려집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몰래 빵을 감추고 나가다 남편에게 들키자 그 빵이 장미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겁니다. 그래서 성녀는 제빵사와 빵집, 자선사업 기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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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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