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제20조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천명합니다. 종교가 정치와 밀접히 연결되어 관여했을 때 발생했던 여러 부작용과 폐단을 생각하면, 각자의 영역을 정확히 구분하고 존중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 삶의 어느 부분까지를 ‘정치’의 영역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정치’란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을 의미하지요. 종교가 그런 공적인 국가권력에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교분리의 원칙’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각종 사회문제와 부정, 비리를 바로잡고 개선하는 일을,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며 공동선을 실현해야 할 신앙인으로서의 마땅한 책무까지 나 몰라라 한다면 그건 명확한 ‘직무유기’로서 우리가 단호하게 배격해야 할 모습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정치와 종교를 지나치게 분리하려고 들어서 문제라면,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를 지나치게 연관 지어 생각해서 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구원자 ‘메시아’를 고대하면서, 정치적 지도자인 ‘왕’의 모습으로 와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탁월한 능력으로 자신들을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강대국으로 만들어줄 것을 기대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정치적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되고자 하신 메시아는 인간이 해야 할 어려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고충 처리반’도, 복을 가져다주며 소원을 이뤄주는 ‘요술램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풀고 용서하는 하느님,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시고 보살피시는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에서 바라야 할 것은 나의 개인적 소원성취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일임을, 그것이야말로 그분의 참된 자녀다운 모습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군중들도, 심지어 옆에 못 박힌 죄수조차도 ‘당신이 메시아라면 자신을 구원해보라’고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께 대한 매우 악랄한 도발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일관적인 모습, 즉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받은 아드님이시지만 그 권한을 당신 자신을 위해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만 사용하셨던 원칙을 근본부터 흔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백성을 위해 받은 권한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용함으로써 백성 전체를 큰 고통과 도탄에 빠뜨리는 모습을 역사 안에서 수도 없이 봐왔으면서도, 그것이 당연하고 올바른 모습인 것처럼 말하는 그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잘못된 편견과 고집 때문에 자신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시는 예수님을 음해하고 배척하기까지 하니 스스로 제 복을 걷어차고 멸망을 재촉하는 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옆에 못 박힌 한 죄수만은 그런 잘못된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무력한 모습으로 고통받고 죽임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참된 ‘임금’이자 주님의 모습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참된 임금으로 모시는 주님께서는 불쌍하고 약한 존재인 인간을 보살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처지에 있는 죄인들, 병자들, 가난한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시기 위해 고통과 번뇌, 외로움과 고독, 십자가와 죽음까지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시련과 환난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며 그분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우리에게만 부여된 특권입니다.
함승수 신부(서울대교구 수색본당 부주임)
※지난 2년 동안 ‘생활 속의 복음’을 연재해주신 함승수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부터 서춘배(의정부교구 병원사목위원회) 신부님께서 집필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