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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자 수녀의 하느님 자취 안에서] 68.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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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연합회 주최로 ‘생명평화순례’를 다녀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서해안 일대에 석탄화력발전소가 밀집해 있음에도 지금까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이사야서 43장 19절의 “나는 광야에 길을 내리라”는 말씀을 품고 순례를 시작했다.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걸으며 길을 낸다는 마음으로 걸었다. 당진화력발전소에서 시작하여 태안, 신보령, 신서천 화력발전소를 지나 새만금 수라갯벌까지 걷는 일정이었다. 구간별로 피케팅도 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침묵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말문이 막혀버렸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서해안 바닷가 해안선을 끊고 무지막지한 발전소들이 들어서 있는데, ‘아, 꼭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올라왔다. 발전소를 끼고 설치된 방조제 길을 걸을 때는 한쪽에는 죽어가는 땅을, 다른 한쪽에는 아직 살아 있는 땅을 볼 수 있었다.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아직 살아 있는 땅을 찾아와 잠시 숨 돌리고 있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방조제 위에서 이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니, 그저 “우리를 좀 도와줘!”라는 소리로 들렸다.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우리가 끊어낸 생명의 연결을 어떻게 다시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느님 창조가 계속되도록 ‘협력자’로 불리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걷는 내내 땅의 울부짖음과 모든 생명들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특별히 새만금 수라갯벌에서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것 같은 풍경에 모두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갯지렁이와 방게, 그리고 고라니와 독수리들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단풍을 만든 칠면초도 ‘나 아직 여기 살아있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수문을 닫아 마치 죽은 땅처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던 갯벌에 희망을 품고 물꼬를 터놓은 사이 이들이 다시 숨쉬기 시작했다고 한다. 활동가들은 우리에게 이 말을 하면서도 이 생명의 신비에 전율하는 듯했다. 아직 이 갯벌은 살아 있다. 12년간 농사를 지어본 나로서는 갯벌 또한 땅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땅 한 평에 1억 마리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사실처럼 이 갯벌에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음을 믿을 수 있었다. 땅의 울부짖음을 내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수라갯벌은 제주 강정마을이나 성주와 많이 닮았다. 나봇의 풍성한 포도밭과 같이 아름다운 이 땅을 아합의 군사요지로 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안타까웠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우리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생명의 연결망이 끊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돌이켜 바른길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노아 때처럼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못 듣고, 그때를 알아보지 못하면 우리 또한 노아 때처럼 물살에 휩쓸려 갈 것이다. 수라갯벌을 본 사람은 안다. 그 갯벌이 바로 방주라는 것을. 방주를 살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는 우리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싸우자고 덤비고, 서로를 향한 삿대질로 끌어내리려 하며, 관망하면서 모진 말들로 탓을 돌리는 것은 우리에게 맞는 품위가 아니다. 사랑! 사랑에 호소하는 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품위이다. 주님께서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으킨 전쟁도 없애시는 분이시다. 이 주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주님을 닮은 이들이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길의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주변에서 서성이고 있는지, 아니면 생각만 하고 걸어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혹시 지금 마음이 돌아섰다면,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갑시다!” 사랑으로….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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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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