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코끝이 시린 겨울이 왔다. 김장배추 걱정 않고 겨울을 맞이하니 뭔가 애틋함이 덜한 느낌이다. 김장 전에 서리라도 내릴까 봐서 가슴 졸이고, 밤사이 고라니가 배추를 먹고 가지는 않았는지 염려했던 날들이 있었다. 이곳 서울 공동체에서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소금에 절인 배추를 사서 김장을 했으니, 이러한 감사로움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가슴 졸임을 포함한 상징이 이 배추이며, 김치라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 공동체는 18명의 수녀님이 함께 모여 사는 큰 공동체이다. 거의 모든 수녀님이 서로 다른 사도직을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아니면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무관심하게 마치 기숙사처럼 공동체에 기거할 수도 있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런데 수도공동체가 다른 것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함께 모였다는 것, 그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고, 함께 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사도직은 다를지라도 식탁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하나의 목적을 위한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녀님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해줄게요”, “잘 될 거예요” 하며 지지해주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앓거나 늦는 자매를 위한 밥상을 챙기는 것, 건강 챙겨가며 일하라고 염려해주는 것은, 수도공동체가 한 식구임을 느끼게 하는 소중한 은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수도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한 식탁에서 밥을 나누며, 함께 대화를 하기 때문에 이 은사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다. 간혹 긴장이 오고 갈 수도 있지만, 이 또한 함께 성장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된다.
여럿이 모여 살다 보니 누군가가 전체 수녀님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에는 주의집중의 표시로 식탁에 준비된 종을 울린다. 할 이야기가 있다는 표시이다. 그러면 모두 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자세가 된다. 엊그제 아침에는 상담 사도직을 하시는 한 수녀님께서 이 종을 울리셨다. 우리는 모두 모여와 자리에 앉아 경청하는 자세가 되었다. “수녀님들과 정말 따뜻하고 감사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라고 수녀님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수녀님은 상담하시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계시기 때문이다. 얘긴즉슨 수녀님께서 교도소에 있는 형제님을 상담해주고 계시는데, 그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녀님은 만나는 분들이 어떤 일을 하셨던, 과거에 어떤 잘못을 하셨든지 간에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를 하느님께서 얼마나 기다리고 계시는지를 알아차리도록 도와주고 계시다. 그런데 사형수로 계신 형제님이 비누로 성모상을 조각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잘 만드셔서 성모님이 들고 계신 묵주의 한 알 한 알까지도 정교하게 다 새길 정도로 정성을 들이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보다 놀라운 것은 이 작업을 손가락 마디만 한 나무 꼬챙이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감옥에는 조각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눠주시는 수녀님의 눈에서 꼬챙이 하나로 성모상을 조각하신 사형수 형제님의 간절한 ‘기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우리 모두도 형제님의 그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시는 그루터기의 이미지이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베어져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 둥치에서 햇순이 돋아난다. 우리 눈에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과 상황일지라도 ‘주님의 영’이 머물면 가능하다.
수녀님의 나눔으로 우리는 모두 감사해 하면서도 숙연해졌다. 사형수의 절실함이 꼬챙이 하나로 성모상을 만들게 하였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루터기의 절실함이 햇순을 돋게 하였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너의 손에는 더 좋은 도구가 있다. 그러나 너는 무엇을 조각하고 있는가? 어떤 절실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