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은 수녀가 묻고 살레시오 성인이 답하다] 21.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찾으려면
▲ 희망은 곧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pixabay 제공 |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안녕하세요. 며칠 전 지인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내의 지병이 악화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요. 그의 울먹임이 가슴 시리게 들려왔지요. “수녀님, 전 아내 없이는 못살아요. 어떡해요.” 이때 제 입에서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말들, “희망을 놓지 마세요. 힘내요. 기도할게요!” 그 순간 제 말이 왜 그렇게 공허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마치 메마른 가지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잎새처럼요.
그가 어찌 희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찌 힘내고 싶지 않겠어요? 누구보다 기도하고 희망하고 싶겠지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희망의 말 하나를 꺼내기 위해 깊은 고뇌와 공감이 함께 따라 나와야 한다는 것을요. 희망을 위한 행동을 취하겠다는 진심만이 희망을 말할 수 있다고요. 너무 가볍게 희망과 긍정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데도 희망은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언어 하나가 정말 희망이 되어주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희망을 찾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에게
안녕하세요. 김 수녀는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말하는 순진한 낙관론자처럼 느껴져서일까요? 죽음이 절망이고 삶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긍정과 낙관 그리고 희망은 어떻게 다를까요? 지난 편지에서 우리가 희망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요.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할까 해요.
지금보다 더 괜찮은 내일을 믿고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낙관하고 긍정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낙관과 긍정의 태도는 우리 삶을 인식하는 방향에 영향을 주니까요.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 무엇이 옳고 좋은지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부정적으로 보면 무엇이 나쁜지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여기에 함정은 있어요. 긍정적 삶의 태도가 마치 실제 행동과는 무관할 수 있어요. 우리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그저 바라고 또 희망하지만, 희망적인 일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요.
예를 들어 어떤 젊은이는 이제 막 직장에 들어갔는데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원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도박하면서 출세하기를 바라고, 또 어떤 이는 단칸방에 살면서 강남의 건물주를 꿈꿔요. 그러니까 지금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다른 세상을 동경해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최고의 대학을 바라거나 꼴찌를 하면서 늘 일등을 꿈꿀 수도 있고요. 나에게 없는 것을 소유한 사람 그리고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칭찬해요.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라고 생각해요.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다 누리면서 관상 수도회 수도자들처럼 은둔생활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해요. 지금 당장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도 못 견디면서 더 큰 십자가를 달라고 해요. 일상에서 겪는 작은 불편함도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가난한 나라에 가서 선교하겠다고 하고요. 작은 모욕을 참아 받지 못하면서 순교하겠다고 해요. 우리는 용감하게 거대한 괴물이나 악마와 싸우는 것을 상상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작은 뱀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작은 존재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하면 탈이 나듯이 무엇이든 나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도 영혼을 아프게 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긍정이고 낙관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성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자신에게 없는 것을 그것도 노력 없이 원하니 불행하겠지요. 반대로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하겠죠? 그렇기에 난 적게 원하고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을 원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반대로 자신에게 있는 것을 원한다면 어떨까요? 행복하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덕이 있을 겁니다. 친절한 사람은 친절을, 성실한 사람은 성실을, 인내하는 사람은 인내를 원한다면요? 더 충실하고 더 깊이 자신의 미덕을 촘촘하게 실현해 나가겠지요. 이것이 진짜 긍정하고 낙관하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다면 희망은요? 희망은 긍정이나 낙관과 달리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 수 있어요. 삶도 죽음도 내가 선택해서 희망하지 않으니까요. 희망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십자가와 성모님의 순명이 잘 설명해주고 있어요.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희망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