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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의미를 다시금 깊이 되새겨보자. 성탄의 은총을 크나큰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의지에서 비롯된다. CNS |
사랑하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께
성탄절이면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와 이벤트가 잇달아 열리면서 들썩입니다. 성탄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전 세계가 행복하게 즐길 수 있다면 예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요즘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제법 흘러나옵니다. 저도 모르게 기분이 들뜨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요.
그런데요. 그러면서 은근히 죄책감이 느껴지고 불안하기도 해요. 성탄의 참뜻에 맞게 살기보다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문화적인 소비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서요. 하느님께서 저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도대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러면서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가난한 곳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해서 ‘또 오셨구나.’ 딱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때가 되면 해야 하는 의무로 전례에 참여하고 고해성사 보면서 성탄 축제의 달콤함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무한하신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 무한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머릿속에만 묻어 둔 것은 아닌지?’, ‘아기 예수님은 머나먼 베들레헴 마구간에 태어나신 분, 그래서 영화를 보듯 관객처럼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묻고 또 물어보면서 성탄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아기 예수님이 사랑으로 오셨고, 사랑 때문에 오셨는데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지 성인의 지혜를 듣고 싶은 김 수녀 드립니다.
사랑하는 김 수녀와 독자들에게성탄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거룩한 사랑’으로 드러낸 가장 완벽하고도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태양의 품에서 나온 광선을 태양과 같은 물질로 이해하지요. 태양은 빛의 근원이니까요. 하느님의 아들 역시 아버지에게서 왔고 같은 분이지요. 언어의 한계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천사라면 훨씬 더 적절하고 탁월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어머니가 없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고, 지상에서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성모님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성모님을 덮고 그 몸에서 태어나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인데요.(루카 1,35) 주님의 신성과 우리의 본성이 합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를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어요. 이 방법만이 하느님과 우리가 온전히 한가족이 될 수 있고, 완전한 ‘사랑’을 드러낼 수 있던 거지요. 하지만 완벽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강압적으로 받아주라고 요구할 수 없어요.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성탄은 무한한 사랑의 은총이고 선물이지만 오로지 우리의 의지로만 받을 수 있어요. 의지는 사랑에서 힘을 얻고 사랑이 없는 의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발 없는 새’가 있어요. 물론 발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다리가 매우 짧아서 발이 있어도 유명무실하기에 발 없는 새라고 해요. 이 새는 일단 땅에 앉게 되면 다시 날 수가 없어요. 새에게는 죽음과도 같지요. 그러다가 부드러운 바람이 충분히 불어주면 힘겹게 몸을 가누어 날개를 펄럭이며 겨우 날아갈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바람이 분다 하여 발 없는 새가 저절로 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바람의 속도와 시간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던져야 해요.
우리도 바로 이 불쌍한 새와 같아요. 바람이 불어와도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어요. 우리에게 있어 미풍은 하느님의 은총이지요. 이 은총의 바람에 기대어 우리의 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어요.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받기만 하고 삼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은총의 바람이 불어와도 의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바람이 감지될 때 바로 몸을 움직여야 하고 자발적인 의지로 선택하여야겠지요.
김 수녀는 지금 딱 그 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예기치 않게 하느님의 은총은 갈망과 함께 찾아오는데요. 때론 갈망이 소진되어 상처도 입고 깨지기도 하면서 자책하고 불안해할 수 있어요. 그때 찾아온 불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는 마세요. 현대인들은 불안한 감정을 자신들의 본질인양 여기는 경우가 있어요. 잘 참아내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고요함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사랑의 활동은 원래 늘 부족하게 느낄 뿐이니까요.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평화만은 잃지 마세요. 내적 평온함을 느낄 때 바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순간이니까요. 물론 완전한 신앙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성탄의 참뜻대로 살지 못하고 믿음이 흔들린다고 느낄 때 이렇게 기도하세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이 기도의 의미는 저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믿을 수 없지만 희미하게 빛이 보이니까요. 그러니 도와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으로 사세요! Live Jesus!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씀.
김용은(제오르지오, 살레시오 수녀회) 수녀 -------------------------------------------------------------------------------
※이번호로
본 연재는 마무리하며, 새해부터는 김용은 수녀님의 ‘오늘도, 안녕하세요?’가
이어서 선보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