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타가 되어버린 하느님
전례력의 그 어떤 축제도 성탄만큼 동심에 와 닿지 못할 것입니다. 수십 년 전 가난한 시절에도 거리에 울리는 캐럴과 반짝이는 장식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머리맡에 둔 양말짝까지 어린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이 많았지요. 성당에서 나눠주는 선물이나 성탄 공연 같은 추억은 또 어떻습니까?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도 요즘 사람들의 발길을 구유 앞으로 돌리기엔 부족한 모양입니다. 많은 이들이 동심어린 성탄 이미지와 대비되는 현실에 시선을 뺏깁니다. 어릴 적에는 몰랐던 인생의 일그러진 면들을 보고 세상의 각박함을 겪어내면서, 거룩함과 순수함 같은 단어와 현실 사이에 접점을 찾지 못합니다. 동정 성모의 출산도, 아기 예수의 거룩함도 순진무구한 시절에나 통할 전설로 여깁니다. 신앙은 현실에 없는 유토피아적 공상이 되고, 하느님은 산타클로스 비슷한 존재가 됩니다. 어쩌다 한번씩 생각은 나지만 평소에는 나와 관계없는 분, 행여 나를 찾아오실 때는 오직 선물만 주셔야 하는 분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평범한 일상이나 불안과 고통의 시간에 하느님을 찾을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성탄 판공성사도 성가시기만 합니다. 성사를 보고 잠시 순수한 마음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고해소 밖의 세상은 여전히 삭막하고 세파에 찌든 자기도 바뀌지 않을 테니 성사를 봐서 뭐하냐는 겁니다.
■ 우리 가운데 계시는 말씀
그러나 주님 성탄 대축일에 듣는 하느님 말씀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탄 낮미사에 선포되는 복음(요한 1,1-18)은 일찍부터 ‘로고스 찬가’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대단히 시적이고 철학적인 표현들로 가득한 이 찬가는, 원래 요한의 공동체가 부르던 찬미 노래였으리라 추정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복음서 말미에 왜 이 복음을 기록했는지 밝히지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이렇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외아드님으로 선포하는 것이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라면, 로고스 찬가는 이 주제를 장엄하게 여는 서곡입니다.
여기서 단연 두드러지는 말은 ‘말씀’이라 번역된 그리스어 ‘로고스’(λογο?) 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 신앙인들은 두 가지 문제에 답해야만 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 구약의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야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 철학의 배경 하에 성장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포해야 했습니다. 로고스는 그런 상황에서 대단히 유용한 말이었지요. 창세기 첫 구절을 연상시키는 ‘한처음에’(요한 1,1) 계셨던 로고스,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면서 창조를 실현하신 영원한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지 뛰어난 예언자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외아드님이란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라고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오직 하느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신앙인들이 직면했던 두 번째 문제는 신앙을 오로지 정신적이고 지성적인 활동 정도로 이해하는 영지주의적 경향이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요한복음의 선언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아파트 옆 동에 사셨다’쯤 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만나는 사건은 영지주의가 말하듯 순수 지성의 공간이나, 구질구질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유토피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
요한복음은 이렇게 복음이 집필되던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알립니다. 그런데 이 언어와 표현이 요즘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렵지요. 더욱이 하느님을 산타클로스 정도로 여기는 어린 믿음과 그분을 비루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분으로 보는 편견에 머무는 한, 성탄의 신비는 ‘제 생일도 챙겨먹기 힘든’ 사람들에게 너무 먼 ‘남의 생일’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요한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분명히 전합니다. 몸도 마음도 무탈한 사람들만 비추는 빛이 아닙니다. 너무 순진해서 현실감각 떨어지는 사람들만 비추는 빛도 아닙니다. 요한 당시의 언어와 철학에 정통한 사람만 비추는 빛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신비는 바로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구유에 아기를 뉘여야 했던 가난한 부부에게도(요한 1장), 혼인을 치르면서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도(2장), 허기진 오천 명의 장정에게도(6장)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서른여덟 해를 병마에 시달린 이(5장),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이(9장), 죽은 지 나흘이 된 라자로(11장)에게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급기야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이에게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어디서 뵐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탄 신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디 계시는지 비춰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누추한 일상 안에 계시고,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 안에, 고통을 대물림하는 이들 안에, 죽음의 절망 앞에 선 이들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화답송 시편을 함께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합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