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복음의 앞 문맥을 살펴보면, 산상수훈 담화문을 시작하는 ‘참행복(진복팔단)’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이 오늘의 복음 구절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선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하신 다음에 바로 오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이 이어지기에,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참행복의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은 일상생활에서 보거나 성경의 전통에서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은유입니다. 예로부터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첨가물일 뿐만 아니라, 염장(鹽藏)을 통해 식료품을 오래 저장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품이었습니다. ‘빛’은 신약성경, 구약성경을 막론하고 익숙하고 중요한 은유인데, 신약성경이 아직 쓰여지기 전인 예수님 당대에는 유일한 성경이었던 구약성경에서는 ‘빛’이 주로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토라(율법), 성전, 예루살렘’ 등을 가리키는 은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인 당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너희는’이라는 희랍어 원문 표현에서 강조법을 써서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바로 너희 자신이 빛과 소금”이라는 뜻으로 ‘너희’를 강조하여 표현하십니다. 뒤이어지는 산상수훈 담화문(마태 5,17―7,12)의 가르침들이 말하자면, 어떻게 살아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의 모습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담화문 대신에, ‘빛’을 모티브로 오늘 제1독서를 복음과 연결지어 읽어 보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곧,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길은,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가 ‘뛰어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뛰어난 언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복음 선포하셨듯이(제2독서),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등을 통해 화려함을 자랑하기 바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나 인간적인 드러남’으로써 ‘빛’이 되는 게 아니라, 이웃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거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촉구하십니다.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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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순택 대주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