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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으로 완성되는 시기

[박진리 수녀의 아름다운 노년생활] (7) 내일보다 더 젊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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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리 수녀



주변 어르신들을 보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하루, 한 주, 한 달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날짜 개념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세월 가는 것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며느리 시절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는 시어머니께서 참 오래 사신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사셨던 나이보다 훨씬 오래 살아보니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가 들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훨씬 빨리 시간이 가는 것 같아요.”

현재 노후생활을 하고 계신 대부분 어르신은 ‘노후준비’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공부시키고, 출가시키면 한시름 내려놓을 줄 알았더니 또다시 손자들을 키우느라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새 노년이 되어 있더랍니다. 노년을 마주하고 보니 시간이라는 자원은 많아졌는데 건강과 경제적인 부분이 취약하여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하고 답답하다며 우울감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이런 마음이 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가족들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해 자신이 느끼는 욕구와 감정은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터에서 고구마, 감자, 시금치 등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제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것은 싱싱한 농산물이 아니라 바구니 앞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였습니다.

“할머니, 이 글씨 누가 써 주신 거예요? 글씨가 무척 정성스럽게 느껴져서요”라고 묻자, 부끄러운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씀하셨어요.

“에고~ 수녀님! 제가 글씨를 배운 지 얼마 안 되어 많이 부족해요. 한글을 배우기 전까지는 매번 써달라고 부탁하기 미안해서 이웃들이 글씨를 써주면 비에 젖을까 봐 비닐봉지에 넣어서 사용하곤 했어요. 작년에 한글학교 다니면서 이제야 내 손으로 글씨라는 것을 쓰게 되었는데 지금도 믿겨 지지가 않아요. 요즘은 읽는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거리를 다니며 간판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 간절했지만 가족들 뒷바라지하다 보니 팔십이 넘어서야 글을 배우게 되었네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할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 한글을 배우셨으니 그동안 부러워했던 만큼, 편지 쓰는 것도 해 보시고 문자 보내는 것도 하시면서 남들이 하는 거 모두 해 보셔야지요.”

세월의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디어 내신 어르신의 모습은 주름으로 가득하지만, 마음만은 소녀의 감성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노년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새롭게 시작하기를 주저합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시기가 아니라 정리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정리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제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오늘을 보내게 되고 공허함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체면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오래전 가슴 한쪽에 묻어 두었던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마시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것은 없습니다. 내일보다 더 젊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있으니 말입니다.

노년기는 ‘멈춤’이 아니라 여유로움 안에서 그동안 살펴보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아팠던 상처는 위로해 주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아름다움으로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서울특별시 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 관장 박진리(베리타스) 수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3-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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