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말씀 중에 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할 만큼 어려운 요구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갈등과 다툼을 가라앉히기 힘든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나친 요구요 성취할 수 없는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만히 따져 보면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먼저 첫 번째 독서를 볼까요. 레위기의 말씀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고 그 명령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하라는 지침을 줍니다. 거룩한 사람은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기 위해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고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어딜 가나 문제가 생기면 남의 잘못을 지적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등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사태가 악화될 때까지 가만있다가, 뒤늦게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지요. 입바른 소리는 하는데 정작 자기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까지 더 하면 문제를 해결하기는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죄로 물든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죄와 분노와 죽음은 결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서로 형제자매로 맺어진 모든 사람은 죄의 현실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가 있다면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만 비로소 해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혼자 속으로 앙심만 키울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안 변하면서 다른 사람은 변하라고 강요해도 곤란합니다. 죄와 죽음의 현실을 공동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동족의 잘못을 꾸짖으면서까지 죄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려고 대화하며 애쓰는 사람’은 앙갚음과 앙심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화답송이 노래하듯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가여워하시는’(화답송, 시편 103 참조) 하느님처럼 죄의 상황을 해결하려는 굳은 의지와, 죄지은 사람마저 가엽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어서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하느님 백성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일련의 발전 끝에 나온 것이죠.
먼저 민수기 35장에서는 가족 복수법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불리는 피의 보복자가 여기에 등장하는데, 한 가정의 일원이 부당하게 살해되었을 때, 그의 친족 안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나서서 살인자뿐만 아니라 그의 전 가족을 전멸시키는 복수를 했습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 그렇게 엄한 법이 없다면 안전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가 컸지요.
다음으로 딸리오 법이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이라 하는 이 법에 따르면 복수를 할 때는 받았던 죄의 크기를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신명 19,21) 이 법은 지금 보기에 잔인해 보이지만, 복수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던 당시의 다른 법보다는 개선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고,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하느님의 법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법으로 대치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법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하도록 명합니다. 야만 시대를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법을 실천할 만큼 인간 사회가 성숙했으니, 이제 좀 더 어려운 과제를 주시는 것 같지요. 받은 게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니까요.
그러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법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마음속 분노와 미움을 어떻게 해결하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요? 근본적인 해답을 한 마디로 내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복음에서 실마리는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예수께서 알려주셨지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상대가 나의 관심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말고, 어느 경우에도 내가 할 도리는 다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가야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행동을 하다보면 마음이 바뀌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밉든 곱든 내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하다보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해줄 일도 안 해주려 하거나, 뒤에서 오만 험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안 보는 시간이 갈수록 미움의 싹이 자라고 또 자라서 종국에는 도저히 감당 못 할 큰 나무가 되어버리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 속으로 천불이 나더라도 할 것은 해 주도록 합시다. 당장 용서와 화해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1요한 2,5 참조; 복음 환호송)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제2독서)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