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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숙 노엘라 |
서강대학교 뒷동산, 노고산은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어느 날 마산에 사는 벗이 노고산성지 순례를 왔다. 학교 내 노고산성지가 있다고 했다. 당시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금시초문이었다.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가서 보니, 정문에 들어서자 왼쪽 언덕에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 순교 현양비가 있었다. 그날 이후, 등굣길은 나에게 늘 성지순례였다. 학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들께 우리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께 학교 공동체를 위하여 빌고, 나의 공동체 AFI(국제가톨릭형제회)를 위하여 뱅상 레브 신부님께 기도드렸다.
2년 전 공동체 연피정을 예수회센터에서 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뒷동산 가서 점심 먹고, 소풍 가던 추억을 떠올라 날마다 노고산으로 산보를 다녔다. 노고산은 예수회 한 신부님께서 일평생 숲을 가꾸셨다고 했다. 그 현장을 몇 차례 목격했다. 봄이면 허전한 터에 나무를 심으셨다. 산에 흙이 훑어지지 않도록 줄기 식물을 심어놓고, 산 중허리까지 물동이를 들고 오셔서 물을 주고 계시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누군가의 수고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드렸다. 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면 매화, 개나리, 남산 제비꽃, 황매화, 패랭이꽃, 싸리꽃, 갖가지 단풍이 마음을 머물게 했다.
순교의 얼이 담긴 노고산과 남쪽 하늘 아래 경상도 작은 마을, 꼬미동네와 좋은 인연을 맺고 싶었다. 산을 오르다 보니 씨앗이 떨어져 여기저기서 새싹으로 올라오는 애기단풍이 눈에 들어왔다. 피정 끝나기 하루 전날, 단풍나무 주변에서 올라온 싹을 뿌리가 상하지 않게 살살 뽑아 올렸다. 여태 숲을 가꾼 신부님께 양해를 구해야 마땅할 것이나, 아마 기쁘게 분양해 주시리라 믿으며 노고산성지 하늘 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2그루 애기단풍은 다음날 장거리 여행을 했다. 어린싹이라 22그루라 해도 한 주먹 안에 들어왔다. 애기단풍과 나는 시외버스 안에서 내가 졸 때도, 쉴 때도 끊임없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한 호흡 안에서 둘이 아니라 이미 하나가 되었다. 생명은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간에 있다. 들이쉬고 내쉬지 않으면 죽음이요, 내쉬고 들이쉬지 않으면 바로 죽음이다. 나무에 인간의 생명이 달렸다.
생명을 보살피는 마음은 관심과 배려이다. 한여름 땡볕이 너무 강렬해서 어린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겠나 싶어서 우리 집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마을광장 샛터 꽃밭에 삶 터를 마련해 주었다. 어느 날 단풍나무 숲을 이룰 때, 꼬미마을은 제2의 노고산이 되리라. 그 생태역사를 설명할 날이 오리라. 에밀타케 신부님이 우리나라 여기저기 제주 왕벚나무를 심어서 지금 우리가 왕벚나무 탐방을 하듯이, 단풍나무는 꼬미마을 생태지도에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강렬한 여름, 물기 없고 차가운 겨울 두 해를 보내고 애기단풍은 10그루 살아남았다. 한 그루 한 그루 사라질 때마다 보살핌과 사랑이 부족했구나 싶어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꼬미마을에 생명을 주는 나무, 노고산 단풍나무에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나무 아래서 전국 팔도 사람들이 기념 사진을 찍는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꼬미마을에 꿈과 희망을 심는다.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2,9)
김광숙(노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