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듣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는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옵니다. 공동번역 성경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요. 왠지 마음이 쓰입니다. 불과 여드레 전,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라는 진리의 답변을 드림으로 칭찬을 들었으니 말입니다. 재밌는 것은 마르코 사도와 루카 사도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민망한 순간을 해명해주는 듯한 문장을 삽입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하늘같은 존재였던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으니, 얼이 빠졌을 것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남은 듯, 찝찝했습니다. 그날, 모세와 엘리야는 틀림없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씀드렸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제아무리 빼어난 인물이라도 결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능가할 수는 없으니까요.
‘영’은 하느님의 ‘그 무엇’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인간에게만 당신의 영을 선물해주신 하느님의 뜻은 압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영을 훼손시키지 않기를 바라시며 당신처럼 세상을 살리기 원하신다는 걸 압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당신 뜻에 어긋난 삶을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 귀한 하느님의 영을 제대로 살아내는 방법을 알려주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때문에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하느님을 향한 ‘영성’을 몸소 살아내시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성을 일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며 당신의 힘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생생한 거룩함을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혼’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정신적 영역을 말합니다. 동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영혼’을 바친다고 고백할 때, 그 기도의 무게는 상당한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영과 내 생각과 느낌을 전부 봉헌한다는 뜻이니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지 이천 년, 그동안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전례의 모습이 달라졌고 교회의 문화도 많이 변화됐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반석이신 진리의 말씀, 함께하시는 성령님, 주님의 몸인 성체는 변함없는 은혜를 간직한 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진리이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그 복된 영광의 모습을 새겨 살아가도록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은 빛나는 하늘의 존재임을 선포하십니다. 이 진리를 온전히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낮춰보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하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을 인식하여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도록 힘을 주고 용기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두 지혜를 익혀 복음을 살아내도록 응원해주십니다.
때문에 윤리 교수는 때로 좌절합니다. 삶이란 결코 윤리 과목의 성적으로 채점되지 않는다는 사실, 윤리 성적이 곧 삶의 변화를 일러주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맥이 빠집니다. 물론 가장 큰 자괴감은 허술한 제 삶에서 비롯됩니다. 허세로 치장된 몹쓸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하느님의 아들을 울리고만 있는 듯합니다. 매일,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뜻을 ‘꾸준히’ 망가뜨리는 꼴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스스로의 안녕에 마음이 빼앗겨서 노심초사하며 지내는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나 변화된 삶을 살아내기를 강권하십니다. 제발 세 개의 초막에 꽂힌 마음에서 돌아서라 하십니다. 우리의 영과 혼을 당신께 봉헌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단 한 가지의 필수요소는 사랑뿐임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사순, 진리의 말씀에 무언가를 보태지 않고, 여과시켜 변질시키지도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도록 영과 혼과 몸을 훈련하는 때입니다. 요란한 영의 잡음을 말끔히 털어내고 소란한 마음속을 단정하게 정리 정돈하는 대청소 기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주님께로 다가갑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산재한 온갖 불순물을 제거해 주시길 청합시다. 이제껏 주님의 말씀에 ‘헷갈린 척’ 했던 위선과 주님의 뜻을 ‘못 알아듣는 척’ 했던 뻔뻔함과 세상에 휘둘려 수없이 핑계를 댔던 그 거짓된 삶에서 탈출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써만 주님의 뜻에 외람되지 않도록, 복음의 삶을 꾸릴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희생하고, 겸손한 사랑의 삶을 살아낼 수가 있음을 명심합시다.
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는 말씀에 화답하는 근사한 복음인으로 도약하도록 합시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