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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나요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9. 중독과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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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일과 중 내가 어떤 행위에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지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pixabay 제공



미사가 시작될 무렵 성당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췌한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의 한 남자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팔을 잡고 죄인처럼 끌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깐 나…. 나는 성체…. 모시고 싶다고!” ‘아니, 저렇게 간절하게 성체를 모시고 싶다 하는데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훈계하듯 말했다. “술 마시지 말고 멀쩡할 때 맑은 정신으로 다시 오세요!” 결국 남자는 밖으로 끌려나갔고 성당 문은 굳게 닫혔다.

미사 내내 ‘성체를 모시고 싶다’라는 그의 간절한 외침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여기 모인 우리는 멀쩡한가? 모두들 맑은 정신은 지니고 있나? 끌려나간 남자보다 성전에 머물 자격은 더 있는 걸까? 우리 예수님께서 여기 이 자리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술은 마시면 냄새가 난다. 과하게 마시면 자세가 흐트러지고 실수도 하고 정신을 잃기도 해서 누구나 쉽게 알아챈다. 그리고 지나치게 술에 의존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알코올 중독자’라고 한다.

모든 중독에는 세 가지 증상을 동반한다. 첫 번째는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되어주고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갈망한다. 두 번째는 대상을 경험할수록 쾌감은 줄어들어 빈도와 강도를 더 높인다. 마지막엔 대상과 약간의 틈만 생기면 우울과 불안감 그리고 다양한 신체 이상을 겪으면서 결국 욕망의 대상에 종속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증상을 가지고 있어도 냄새도 표시도 나지 않는 중독도 있다. 밤새도록 스마트폰이나 온라인 접속에 취하다가 흐린 정신으로 미사에 참례해도 멀쩡해 보인다. 머릿속은 온통 지난밤에 본 뉴스, 드라마나 게임으로 가득 차 있어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중독의 뇌 반응은 거의 유사하다. 힘들고 외로울 때 강한 자극원을 찾고 보상회로는 빠르게 적응하면서 쾌감의 농도는 떨어진다. 사용 빈도와 강도는 높아진다. 쾌감은 쓰나미처럼 잠깐 훑고 지나가고 남은 것은 커다란 공허함뿐이다. 악순환의 반복이고 벗어나고 싶어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앤 윌슨 섀프(Anne Wilson Schaef)는 ‘우리는 모두 중독자’이며 ‘언제나 목마르고 끊임없이 갈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개인의 중독은 중독된 사회에서 그 문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눈만 돌리면 중독의 대상은 널려있다. 유혹이다. 더 큰 보상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취하지만 결과는 절망이다. 중독은 그 자체로 뇌를 훼손시키고 유혹에 대한 자제력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우린 무엇을 절제할까를 고민한다. 술, 담배를 줄이겠다는 사람도 있고 금육이나 금식을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 사용을 절제하고 온라인 접속을 줄이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기야 스마트폰 없이 지낸다는 것은 이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이 들 때까지 지나치게 의존상태에 빠져 산다. 몸과 마음은 물론 심각한 영적인 문제다.

나는 어디에 중독되었을까? 나만이 안다. 빠져들수록 나의 뇌와 마음과 영혼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요. 머리론 알지만 절제가 안 돼요.”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일단 내 행위에 대해 가벼운 진단을 해본다. 내가 어떨 때 온라인 접속을 하는지. 언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지. 내가 그 순간 진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쉼인지 이완이지 자유인지 즐거움인지. 그렇다면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이 필요를 채울 수는 있는지 찾는다. ‘하지 말자!’는 채찍이 아닌 ‘아, 내가 무엇이 필요하구나.’하는 필요를 알아챈다.

사순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절제를 해야 한다면 나만이 아는 나만의 부끄러운 습관과 마주해야겠다.



영성이 묻는 안부

‘유혹의 민주화’라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거대한 파티에 초대된 사람처럼 마음껏 즐기는 것이 하나의 문화처럼 되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 ‘욜로’(you only live once)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네요. 인생을 최대한 누리며 살라는 말인데요. 여기에 좋고 나쁜 것은 없어요. 단 유혹이 너무 강력해서 자기절제나 자제력이 힘을 못 쓰고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죠. 만약 참고 인내하기보다 충동에 무릎을 꿇는다면요. 올바른 선택이 내 역량 밖에 있다면요. 이렇듯 행동이 통제가 안 된다면 우린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자제력과 절제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신앙은 또 어떻게 지킬까요? 분명한 것은 약간의 자제만으로도 삶의 질을 높이고 영적으로도 향상된다는 것이지요.





김용은 수녀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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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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