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숙(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
꼬미 마을 주변에 누가 누가 살고 있을까? 언젠가는 꼬미 마을 생태지도를 만들리라. 명동에 살 때 남산의 4계절에 찾아오는 자연 벗들의 이름을 익히기 위해 사진을 찍어 식물 이름을 알려주는 앱에 물어보곤 했다. 어떤 이름은 찾아볼 때 그때뿐이었고 똑같은 이름을 반복적으로 잊어버리면 그 벗에게 미안한 마음이 올라온다. 사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열린 마음을 접어두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만나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만날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늘 뒤통수가 켕긴다.
귀향한 그 해 말에 뒷동산에 임도(林道)가 생겼다. “오호라, 산림청에서 때를 맞추어 나를 위해 산책길을 마련해 주었구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예전에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가던 길, 초등학교 다니던 그 길들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마을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등산을 가자고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갈 정도로 산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길이 생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설렜다.
봄에는 누가 살까? 어릴 때 지천으로 깔렸던 할미꽃은 어디로 갔을까? 또 제비꽃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세월따라 그들도 도회지로 나갔을까? 꽃대가 동그라미를 그리며 앉아있는 노란 앉은뱅이 꽃들이 드문드문 길가에 보였다. “너, 처음 보는데 반갑구나.” 갑자기 서강대 뒷동산인 노고산에 군락을 이룬 남산제비꽃이 그리워졌다. 겨우내 움츠렸다가 봄이면 여지없이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해 주던 꽃이다. 이제 노란 앉은뱅이 꽃이랑 친해져야겠다. 복사꽃이랑, 참꽃이라 부르던 진달래, 너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참 고맙다.
여름에는 누가 살까? 산허리 길을 지나가 골짜기를 내려가면 산딸기가 길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산딸기에 대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소에게 풀을 먹이다가 배가 출출할 때면 산딸기나무에 옹기종기 붙어서 맛있게도 냠냠 먹던 기억들과 산딸기 가시에 찔려 어쩔 수 없이 그 맛 난 딸기에서 멀어져야 했던 아쉬움도 올라온다. 그 산딸기를 이 길에서 만나다니…. 지금은 찾는 이 드문 산길에서 너 홀로 열매 맺고 있구나 싶었다.
가을에는 누가 살까? 싸리나무가 산허리 길에 축대처럼 여기저기에 있고, 연분홍 작은 꽃이 피어있다. 흔하게 보던 꽃이고, 싸리나무를 엮어서 마당비로 썼지만 귀하게 여기지는 못했다. 올해는 그 고마운 싸리나무를 다시 만나고 싶다. 자주 보던 싸리나무 대신 처음 본 배풍등에 눈이 갔다. 앵두보다 작은 빨간 배풍등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려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다. 이 길은 배풍등 길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실 텐데….
호젓한 겨울은 간간이 참새들의 합장과 더불어 늘 푸른 소나무와 잎을 떨군 나무들이 한 계절을 지켜내고 있다. 새롭게 살기 위해 온전히 비우는 시간이다. 다시 살기 위해 나이테를 하나 더 만들고 뿌리도 더 깊이 내려서 더 단단하게 살기 위한 준비이다.
꼬미 마을 자연 벗들이 한 해 동안 심심할 틈도 없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한결같이 찾아와 주는 한, 인생은 맛이 난다. 생태지도가 완성되는 그 날을 위해 나 또한 성실하게 나의 삶의 자리를 지키리라. “그분께서는 계절과 축일을 정해 놓으셨다.”(집회 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