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은 가족 내에서 불화가 생겼다면서 깊은 한숨을 토했다. 시누이들이 가족 단톡방에서 자기를 대놓고 비난을 하더란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단톡방을 나왔는데 강제로 또 초대를 당했다고 한다. “절대로 나가면 안 된다”는 개인 메시지까지 받았단다. “아니, 그건 폭력이잖아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목소리가 올라갔다. “어쩌겠어요. 가족인데…. 도망갈 수가 없어요.” L은 체념한 듯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요즘 나가고 싶은 단톡방이 있는데 나갈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들 마음대로 초대해놓고 나갈 수가 없어요!” 하며 짜증 섞인 말투로 하소연을 해왔던 Y가 생각났다.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으면 “제발 뭐라도 남기면 안 돼요?” 하는 항의까지 받았다고 한다. 언제부터 우린 단톡방에서 나갈 자유도, 침묵할 자유도 잃은 것일까. 그러면서 요즘 공감표시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란다.
소통의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소통의 욕구는 더욱 폭증하면서도 도리어 과잉소통으로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간다. 미디어 생태학자 조수아 메이로위치(Joshua Meyrowitz)는 미디어의 출현으로 장소 감각(sense of place)을 상실했다고 한다. 물리적 현존과 직접적 경험이 감소되면서 시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새롭게 규정되고 장소 감각을 잃음으로써 생각과 행동의 변화로 몰고 와 혼란을 겪고 있다. 물리적 현존이 사라진 가상공간에선 내부와 외부,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졌다. 문을 닫고 잠글 수도 없어 나를 보호할 보호막도 없다. 마냥 열어놓고 언제든지 침입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해야 한다.
나의 상황이야 어떠하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맞아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디지털 덕목이 되고 말았다. ‘친교’를 위해 소통하는 단톡방엔 오로지 ‘공감’만을 강요받는다. 원하지 않아도 초대되고 나갈 땐 비난을 받는다. 경계가 무너져 적정 거리가 없는 디지털 공간에는 모호한 심리적 거리만 있을 뿐이다.
우린 서로에게 모두 타인이다. 가족도 친구도 타인이다. 조금 더 친한 타인과 조금 더 낯선 타인이 있다. 함께 살고 싶은 타인이 있고 같이 있고 싶지 않은 타인도 있다. 타인과는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가 있다. 싫어서도 미워서도 아닌 존중하기 위한 거리다. 그런데 단톡방은 적정 거리가 유지되기가 어렵다. 생각이 달라 ‘아니오’, ‘싫어요’라고 할 수 있는 타인이 아닌 ‘좋아요’, ‘사랑해요’ 해야 하는 ‘우리’만 있다. ‘좋아요’란 공감 표시는 획일화된 반응(reaction)이다.
난 전화를 제때에 받지 않는 편이다. 전화와 카톡 모두 무음이다. 내가 필요할 때 보고 답할 수 있을 때 한다. 그래서 전화해도 잘 안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전화는 왜 가지고 다니느냐는 핀잔을 받을 때도 있다. 까다롭고 연락하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일은 결코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괜스레 신경이 쓰인다. 그러면서도 쉼 없이 연결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괜찮은지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단톡방이 단순히 알림 전달용이 아닌 잡담이나 가십의 장이 되어가기에 더 그렇다.
만약 마음의 평화를 해치는 단톡방에 갇혀 있다면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남아있을 자유가 있다면 또 누군가는 나갈 자유도 있다. 누군가 반응할 자유가 있다면 또 누군가는 침묵할 자유도 있다. 물리적 현존으로 마주하는 관계보다 보호막이 없는 모바일 관계가 더 중요해지면서 나의 일상과 리듬이 흐트러지고 있다. 쉼이 없는 모바일 소통은 집중력을 떨어트리고, 주의력이 산만해지면서 기억력에도 부담을 준다. 그렇게 되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삶의 의미와 방향마저 잃을 수도 있다. 끊어지지 않는 ‘연결’로 뒤섞여 너와 나를 구분하는 적정선이 희미해진다면 늘 피로할 수밖에 없다. 나만의 리듬과 일상 안에서 ‘나’라는 ‘혼자’를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고요해지고 절대자와 만날 수 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요한 8:29)는 확신으로 ‘혼자’ 머무는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한 때다.
영성이 묻는 안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슴도치 딜레마’ 일화 기억나시죠?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인데요. 추운 겨울 고슴도치들은 살아남기 위해 바싹 달라붙지만,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게 돼요. 떨어지면 춥고요. 그래서 겨우 터득한 것이 아프지 않을 정도의 적정 거리를 찾게 되는데요. 디지털 세상엔 거리도 가시도 보이지 않아요. 표정도 목소리도 없고 그저 글자만 있을 뿐이죠. 그렇기에 종종 누군가를 침범하고도 잘 인식을 못 해요. 그래서 더 상처가 되기도 하고요. 쉬지 않고 주고받는 메시지가 마음의 평화를 깬다면 과감하게 거리를 두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