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에서 태어난 마르티노 성인은 649년 테오도로 1세 교황이 선종한 뒤 교황으로 선출됐습니다. 당시에는 교황이 선출되면 황제의 승인을 받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티노는 승인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종교 문제에 관한 한 황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황제가 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르티노는 교황이 되고 가장 먼저 이단인 단의론(單意論)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의를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 단의론이란 그리스도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모두 있지만, 하나의 의지만 있어 그 움직임도 하나라는 이론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수한 인간적인 의지는 신적인 의지 속에 해소되어 없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마르티노는 부제 때 교황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된 적이 있어 단의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된 지 3개월 만에 라테란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해 단의론 이단을 단죄하고, 이에 대한 언급을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려 했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칙령 엑테시스와 콘스탄스 2세 황제의 칙령 티포스를 거부했습니다. 아울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바오로와 그의 선임자를 파문하고, 정통 교의를 담은 20개 규정을 발표했습니다.
마르티노의 결정은 아프리카와 영국, 스페인 주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테살로니카의 주교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부터는 강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이미 파문 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바오로 총대주교는 콘스탄스 2세 황제의 티포스 칙령에 서명하도록 더욱 강력한 정책을 사용할 것을 황제에게 요구했습니다. 황제 또한 자신의 종교 정책에 도전한다고 여기고 즉시 마르티노를 체포해 압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압송의 명을 받은 올림피우스 총독은 마르티노가 받는 폭넓은 지지를 확인하고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황제는 마르티노가 불법적으로 교황에 선출됐다고 주장하며 새 총독을 뽑아 압송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마르티노는 병중에 있어 라테라노 대성전에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임 총독과 군인들이 대성전까지 들어오자, 로마 대중들의 피해를 고려해 “항거하지 않고 황제에게 간다”고 선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르티노는 병든 고령의 몸을 이끌고 에게해를 출발해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대중의 조롱과 모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감옥으로 이송된 뒤에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잔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결국 정통 교의에 대한 심문이 아닌 올림피우스의 반역에 동조했다는 반역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감 생활에 들어간 마르티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간청으로 황제에 의해 유배형을 받고 크림 반도의 케르소네수스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얼마 후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시신은 유배지 인근 성모 성당에 안치됐다가, 이후 로마 성 마르티노 성당으로 이장됐습니다. 로마 교회는 정통 교의를 지키다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한 그를 순교자로 현양했습니다. 마르티노 1세는 순교자로 공경 받는 교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