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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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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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고 순진한 이들

많은 분들이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추억의 색안경을 벗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사정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추억 속의 지난날이 아름답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면 고개를 젓는 것은 그런 까닭이겠지요.

오늘 첫째 독서에 담긴 초대교회 이야기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 공동체를 환상적일만치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신앙인이 아니었던 시리아계 그리스인 작가 루치아누스는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봤는지 신랄하게 폭로합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종자인 이들이 제일 먼저 확신하는 것은 자신들은 불사불멸하며 영원히 살리라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죽음을 경멸하고, 심지어 자진해서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 그래서 이들은 모든 것을 경멸하고 모든 것을 공동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 따라서 돌팔이나 사기꾼도 만일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이 어리석고 순진한 이들을 협박해서 재산을 등쳐먹을 수 있을 것이다.”(루치아누스 「페레그리노의 죽음」 중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보는 두 개의 다른 시선이 충돌합니다. 과연 부활을 체험한 첫 공동체의 실상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 실체적 진실을 엿보게 해줍니다.

의심 많은 토마스

토마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부활을 쉽게 믿지 못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입을 모아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라고 증언해도 자기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못 믿겠다고 버팁니다. 꼬치꼬치 따져서 앞뒤가 맞아야 겨우 수긍하는 사람, 회의주의자의 전형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넘쳐 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마리아부터 놀라운 치유 이야기와 물 위를 걸었다는 식의 기적들, 그리고 부활까지 일상의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보면 모두가 황당무계한 사건들입니다. 토마스의 불신이 오히려 더 납득이 가는 상황이지요.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토마스 사도도 못 믿을 이야기를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신앙인이 믿기는 더 어려울 터입니다.

불신의 이유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토마스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하기야 우리에게 생각할 줄 아는 머리를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니, 우리가 생각하고 따지는 일 자체를 나쁘다고 하실 리 없습니다. 복음 본문을 유심히 관찰하면, 토마스가 부활을 못 믿었던 까닭이 다른 데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태도 때문에 불신에 빠졌다고 한다면, 우리 교회 2000년의 역사 속에 출현한 저 많은 석학들과 천재들은 도대체 어떻게 신앙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또 수난 이전의 기적과 치유 사화 어디에도 토마스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의심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토마스의 불신은 그의 합리적 성격과 과학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그들의 증언을 무시한 탓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요.

공동체와 부활 체험

사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처음부터 영웅적인 복음의 증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겁에 질려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루치아누스 같은 사람이 “어리석고 순진한 이들”이라 부를 만큼 허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서로 모일 줄 알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감을 서로 나누기 위해서 함께 모였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어설퍼도, 최소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줄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거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평화가, 그리고 용서가 제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겁에 질려 스승을 배반했던 그들의 죄책감이 씻겨 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부족하고 어설픈 사람일망정, 함께 모여 있으니 하느님의 평화와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리판단이 분명한 그는 스승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하던 동료 제자들을 믿지 못했고, 자신과는 격이 안 맞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혼자 떨어져 있지요.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다시 제자들과 모인 다음이었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왕년에 동고동락했던 이들을 만나니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부활을 못 믿겠다고 따지던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손을 내미셔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같은 스승을 모시는 제자들끼리 모이는 그 자리에 다시 발을 내밀었을 때, 그 순간에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자비로운 공동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실로 다양한 이들로 이루어집니다. 명민하고 학식이 깊은 분부터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분, 살림살이가 넉넉한 분부터 가난에 한이 맺혀서 움켜쥐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분까지 다양한 분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벽을 치워 내고 하나로 모이기 시작할 때, 거기에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용서가 있다고 오늘 복음이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못 믿는 것은 내가 너무 똑똑하고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기꺼이 열어 주고 봉사하려는 마음과 실천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마침 부활 제2주는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교회는 사회 각계의 엘리트 집단도, 윤리적 모범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남들에게 ‘어리석고 순진한 이들’로 보이는 공동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느님의 자비를 닮으려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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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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