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에 살아서 산을 그리워하는 걸까? “산에 가자”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고 싶은 심정이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산을 오르는 일이다. 평생동안 동행할 벗을 찾았지만,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내 주변에 있었던 벗들은 대부분 산 오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새벽 미사 후에 마산역 뒷산을 혼자 다녔고, 만남 약속을 할 때 카페보다는 남산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제주에 일하러 가면 하루 시간을 내서 반드시 한라산에 올랐다가 집으로 돌아왔고, 공부하는 동안 학교 뒷산 노고산은 쉼터요, 놀이터였다. 지금 생각하니, 산을 좋아하는 벗을 만나게 해 주셨더라면 산에 미쳐서 하느님을 멀리하였을지도 모르기에 나를 당신께 잡아두는 신의 안전장치였는가 싶기도 하다.
명절에 고향에 오면 산속에 있긴 하나, 산을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언젠가 마을 뒷산에도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그것을 새겨들으셨을까? 어느 날 둥근산에 오솔길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 옛날 소먹이러 다니던 길을 복원(?)하신 것이다. 깜짝 놀랐다. 평상시에도 다른 사람의 말을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서 가슴이 찡했다. 갖가지 풀들과 엉겅퀴 나무들이 얽히고설켜 있는데, 낫으로 제거하셨단다. 다닐 때 가시에 찔리거나 잡나무에 걸리지 않도록 말끔히 정리하여 산을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면 여름이면 풀들이 길을 막아버리고 가을이면 나뭇가지들이 자라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1년에 두어 번은 길을 다듬어야 한다. 예전처럼 발이 번쩍번쩍 들리지 않아 작은 풀에도 걸려서 넘어질 뻔 한다는 팔순 노인이 가파른 산에 길을 내시다니.
길을 마무리 해두고, 이 길을 마을의 명소로, 마을 산책길로 소개를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보기 위해, 노인회장님인 아버지와 노인회 총무님과 나, 셋이서 길 점검에 나섰다. 시멘트로 마감한 임도보다 나는 이 길이 백배 좋은데 총무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너무 가파르고 험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올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하신다. 낭패다. 하지만 마을을 찾는 젊은 방문객들에게는 좋은 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짧게는 한 시간가량, 길게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짧은 코스이지만, 산꼭대기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그 시간은 다른 무엇에 비길 수가 없다.
마을을 방문한 몇몇 벗들을 둥근산 오솔길로 초대했다. 울퉁불퉁한 산길에 적응되기 전까지 모두 힘들어했다. 산 정상에 오르면 길게 펼쳐진 낙동강을 보며 감탄을 한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장신(長身) 오동나무가 보랏빛 꽃잎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기 시작하여, 아카시아꽃 향기에 취해서 어느새 산과 동화가 되고, 복숭아나무 군집터에서는 복사꽃을 바라보면서 봄을 만끽한다.
이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한 노인회장님께 감사드린다. 한 사람의 땀과 수고로 마을은 사람 향기나고, 살 맛이 나는 공동체가 된다. 사람이 길을 내고 사람이 길을 간다. 어느 누구라도 인생길을 간다. 하늘나라 도착할 때까지 인간은 길 위에 선 존재이다. 길 위에서 삶을 깨우친다. 둥근산 오솔길을 낸 노인회장님을 통해 타인을 향한 배려와 관심이 사랑임을 배운다. 내 언제나 사랑하며 살리라~♬ 노래가 절로 나오는 오늘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