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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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숙 노엘라의 생명의 빛을 찾아서] 19. 꽃과 나비 벽화/사회생태

김광숙 노엘라(국제가톨릭형제회 A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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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들이 첫 공동 예술작품을 만드는 날이다. 마을회관 마당에 있는 탁구장 앞 벽면에 벽화를 그리기 위해 80·90대 어르신 여덟 분과 젊은 여성 네 사람이 모였다. 보행용 수레를 밀고 오신 94세 어르신도 수레 위에 앉아서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셨다. 하얀 벽면을 바라보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모두 붓 하나와 요플레통에 든 물감을 하나씩 받았다. 마을회관 입구라 마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데, ‘작품이 엉망이 되면 어떻게 하나?’ 잠시 염려했다. 벽 앞에 다가가 자세히 보니 연필로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코스모스 꽃잎 하나, 나비 한 마리가 벽면 군데군데 있었다. 아하, 이것쯤이야….

어르신들이 욕실 의자 하나씩 깔고 앉아 꽃잎 안에, 나비 안에 색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고, 손이 떨리네”, “눈이 침침해서 밑그림이 안 보이네” 하시면서도 행여나 색이 밑그림 바깥으로 나갈까 봐 얼마나 집중해서 작업하시던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몇 년 후에는 몇 분이나 살아계실까? 마을회관을 드나들 때마다 꽃과 나비 작품을 보면 이 어르신들이 그리워질 것 같았다.

모르긴 해도 붓과 물감으로 뭔가를 그려보는 경험이 낯설지는 않으신 듯했다. 몇 년 동안 이장님이 열 분도 안 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많이 유치하셔서 마을회관은 어르신들의 교육장이었다. 지극 정성을 다하여 몰입해서 한 개를 그리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어르신들은 틈틈이 다른 분들이 그린 작품을 보며 “삼대댁, 잘 그렸네”, “오실댁, 꽃 예쁘게 그렸네”, “도진 양반은 벌써 두 개째네”, “아이고, 내 것은 이게 뭐꼬?” 하시며 자신은 낮추고 상대는 높이는 어르신들의 대화 또한 먼 훗날 이날을 회상할 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큰 벽면에 작은 점 하나처럼, 그렸는지 안 그렸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품이지만 평생 땅을 일구며 한 마을에서 동고동락한 마지막 세대가 그린 공동작품이라 더 큰 의미가 있다.

대부분 나비 하나나 꽃잎 하나를 그렸고, 손동작이 빠른 몇 분만 두 개의 작품을 그렸다. 누가 보면 “저게 뭔 벽화냐? 애들 장난이지” 할 수도 있지만, 누가 그렸는지, 어떤 세대가 그렸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 연세에 돌아가셨거나, 요양원에 계시거나, 병중에 계셔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분들도 많은데, 아직은 손수 밥을 해드신다. 마을회관에서 90대 선배님 세 분은 쉬게 하고, 갓 90세가 되신 분과 내년이면 모두 구십이 될 세 분이 순번대로 저녁밥을 해드리고 함께 드신다.

하루 반나절 함께 벽화를 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길에서 보이는 탁구장 뒤쪽 벽면에는 귀여운 소녀가 그네를 타고 있는 전문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렸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동네 젊은이들이 다수결로 선택한 그림이었다. 화려한 전문가의 그림보다 어르신들의 꽃과 나비 그림에 마음이 더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한 것은 보람도 뿌듯함도 백배 이상이다.

벽화뿐만 아니라 평생을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서로 돕고 나누는 생활이 몸에 새겨진 세대, 공동체성과 인정을 베푸는 것이 최고의 덕목인 세대, 이 세대의 정신을 개별화된 다음 세대가 물려받아서 공동체성을 살려내고, 살수록 맛이 나는 마을, 볼수록 정이 가고, 알수록 설레는 마을이 되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마을에 신자 공동체가 형성되고, 사도행전의 말씀을 실천할 날을 꿈꾼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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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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