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태생의 독일 선교의 개척자인 보니파시오 성인은 웨식스 크레디톤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보니파시오는 14살 되던 해 너슬링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앵글로색슨 수도원의 사상과 신학 지식, 선교 활동 교육을 받고 입회해 서른 살에 사제가 됐습니다. 이후 수도원 학교장으로 시 작품을 쓰고, 최초의 라틴 문법서를 출간했습니다. 그의 남다른 웅변법과 가르침은 수도원 밖까지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선교사가 되길 희망했습니다. 717년 수도원장 선종 후 후계자로 선출됐지만, 이를 사양하고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을 알현하고자 로마로 떠났습니다. 몇 차례 교황을 알현한 보니파시오는 719년 교황으로부터 라인강 동쪽 이교도들에게 선교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때부터 보니파시오는 독일 튀링겐에서 지식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된 활동을 원했던 보니파시오는 가장 이교도적 지역인 헤센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에 최초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며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자, 교황은 보니파시오를 불러 주교로 서품하고, 독일의 모든 수도자와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습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약 2년간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습니다.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에서 이도교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후 보니파시오는 교황의 명을 받고 튀링겐에서 교리 지식이 부족한 사제들과 이교도적 관습에 빠진 이들을 위해 오르트루프에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영국 수도자들을 독일 선교사로 파견받아 선교 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732년 그레고리오 3세 교황은 보니파시오를 명의 대주교로 승품하고 장차 설립될 독일 교회의 주교들을 서품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지방에 잘츠부르크교구, 레겐스부르크교구, 프라이징교구를 설립하고 수도원도 세웠습니다. 744년 하이덴하임수도원에 이어 세운 풀다수도원은 독일 종교와 지성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 특사로 활동하면서 피핀 3세를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이후 독일 남부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핀 3세의 견제로 활동에 제약을 느낀 보니파시오는 마인츠의 대주교직을 사임, 다시 이교도적 관습에 빠진 현 네덜란드 지역인 프리슬란트를 재건하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던 중 754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본강 근처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주려고 준비하던 중 프리슬란트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동료 52명과 함께 살해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보니파시오는 ‘독일의 사도’로 불리며 공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