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미 마을의 한가운데쯤 주민들의 생명수,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리는 이 샘을 큰새미로 불렀다. 윗동네에 작은 새미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동네이지만, 둘로 나누어 윗동네와 샛터로 불렀다. 위에 있다고 윗동네, 새 집들이 하나둘씩 지어진다고 샛터이다. 아침저녁으로 물지게를 지고, 물양동이를 이고 큰새미로 물을 길어 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학교 다니기 전 물양동이 이고 가는 엄마를 뒤따라 우물터로 왔다 갔다 하던 기억이 난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일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부모님 누구라도 아침이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물 길어 오는 일이었다. 그 물로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고, 설거지도 할 수 있으니까.
세월이 지난 후, 집집마다 우물을 파서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리기 시작했다. 마당 귀퉁이에 70~80m 땅을 파 내려가던 모습이 필름처럼 떠오른다. 어느 정도 파 내려갔을 때, 샘처럼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물 나온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함성을 지르고 기뻐하였다. 집 모퉁이 몇 군데 땅을 파 내려갔으나, 물을 만나지 못한 곳도 있었기에 더욱 반가운 물이었다. 물을 끌어올리는 관을 묻고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시작했다. 첫 물이 봇물처럼 올라올 때, 또 한 번 탄성을 질렀다. 그때의 신기함과 그 기쁨은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더 이상 아침저녁으로 물동이 이고 큰새미로 가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한 부분을 덜어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펌프 우물로 노동력의 절감을 가져왔지만, 물을 얻으려면 여전히 있는 힘을 다하여 펌프질을 해야 했다. 어느 날 동네에 수도를 설치한단다. 큰새미에 수도관을 연결하여 집집마다 물을 보급한다는 것이다. 도회지야 진작에 수도시설이 되었지만, 깡시골은 사정이 다르다. 손가락 서너 개만 움직여서 왼쪽, 오른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콸콸콸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는 기쁨이란 무엇에 비길 수 없다. 한 해 두 해, 해마다 마을 자체 내 수질검사를 실시하고, 꿀맛 같은 물을 마시던 시절은 지나갔다. 지금은 수도사업소에 물값을 내는 수도관이 새로 설치되어 그 물을 마시고 있다.
그러고 보니 변화하는 소소한 기쁨이 많은 시대를 살았구나 싶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큰새미는 방치되어 있었다. 두레박도 만들고, 큰새미 현판도 달고, 지붕도 이우고, 새롭게 단장하여 주민들의 공동의 터전을 복원하자는 뜻을 모았다. 기둥 목재를 소나무로 하고, 지붕을 볏짚으로 하자고 했다. 두레박과 현판은 거의 마무리 하였으나, 재료와 방법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포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 해를 넘기고, 마을 가꾸기 사업 포상금 500만 원으로 지역 내 집 짓는 이에게 맡겨서 이를 완성하였다. 우리 손으로 완성한 것보다는 자부심이 덜 생기지만, 아름답게 단장된 모습을 보면서 만족하였다.
큰새미는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앞집, 뒷집, 옆집 주민들의 생활터, 나눔터, 생명터였다. 그 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고, 물 길러러 와서 뒷집 순이의 결혼소식도 나누고, 옆집 철이의 수박 서리 이야기도 나누고, 앞집 할머니, 할아버지 근황도 나누었다. 큰새미는 물로 생명을 이어가고, 마을 주민들이 흉허물없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장소였고, 물동이 내려놓고 쉬어가는 삶의 정거장이었고, 세대에서 세대로 연결하여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는 생활의 보금자리였다.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요한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