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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숙 노엘라의 생명의 빛을 찾아서] 23. 해바라기/자연생태

김광숙 노엘라(국제가톨릭형제회 A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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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농촌 작은 마을을 어떻게 활성화할까? 생태운동가 정홍규 신부님께서 꼬미 마을에 사람들도 찾아오고, 마을 공동경제도 살릴 방안을 주셨다. 꽃도 보고 기름도 짤 수 있는 유채와 해바라기를 심어보라고 하셨다. 유채씨는 실패를 맛봤고, 때맞춰 이웃동네 91세 어르신께서 해바라기씨 한 되를 주셨다. 몇 년 전까지 마을 이장을 십수 년하신 분이 너무 고맙게도 놀고 있는 빈 땅을 빌려서 거름도 내고, 밭갈이도 하고, 모종도 키우겠다고 하였다. 꼬미 마을에 와서 체험하는 일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술술 풀려간다는 사실이다. 하늘이 열리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5월 중순 1500주 모종이 삶 터로 옮겨지는 날이다. 이른 아침 노인회장님은 오토바이로 모종을 밭으로 나르고, 경운기로 물을 줄 호스를 밭에 깔아놓고 파종할 모든 준비를 다 해놓으셨다. 80~90세 어르신 다섯 분, 이장님 내외분, 노인회장님과 선배 언니가 각자의 위치에서 모종을 놓고, 흙으로 덮고, 물을 주다 보니 400평 해바라기밭이 마무리되었다.

한 귀퉁이에는 목화 모종도 심었다. 밭고랑에서 넘어지실까 봐 염려스러운 분도 계시는데, 몸을 사리지 않고 해주신 어르신들이 너무 고마웠다. 자녀들이 알면 호통을 치려나? 작은 일 하나라도 내 손이 간 일은 더 애틋하고 관심을 가진다. 자부심과 보람을 함께 맛보고자 하는 뜻에서 어르신들이 거드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신나게 일한 그 날 점심은 배달된 짜장면이었으며, 서로를 격려하며 맛나게 먹었다.

해바라기는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다. 8월 중순 꼬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을 초대한 ‘고향 방문의 날’(Home coming day)을 기해 꽃들이 활짝 피어주기를 기대했다. 행사 당일, 꽃밭에서 단체 사진 찍는 일정도 넣어두었다. 키가 2m 이상 자라자 노인회장님은 사진 찍을 수 있는 나무 난간을 만들어 놓으셨다.

행사 날이 다가왔다. 노인회장님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사진 찍기 좋도록 해바라기 숲의 마른 잎을 종일 제거하셨다. 다른 곳에서는 꽃이 핀 것을 보았는데, 꼬미 마을 해바라기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꽃을 피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밤낮없이 빌었지만, 해바라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때와 하느님의 때가 다르구나 싶었다.

9월 초 꽃 몽우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1500주 중에 한 송이 꽃이 피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주님.” 찬송이 절로 나왔다.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이튿날 힌남노 태풍이 온다는 소식이다. 평시에도 태풍의 피해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 조용하게 지나가겠거니 했다. 세찬 바람이 불고 간 아침, 제일 먼저 해바라기밭을 걱정했다. 장신(長身) 해바라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싹 쓰러졌다. 뿌리째 뽑힌 것도 있고, 봄의 수고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1주일, 2주일 지나면서 해바라기는 우리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누워서 한 송이, 두 송이 꽃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누워서라도 함께해준 해바라기 꽃들에 감사했다.

십자가의 수난, 죽음, 부활의 여정처럼 힌남노의 수난을 통과한 해바라기는 가을날 새 생명의 씨앗을 영글어 놓았다. 해바라기 꽃을 심으면서 어르신들께 “기름 짜면 한 병씩 드릴게요”라고 한 말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누워서 핀 꽃과 씨앗은 살아있음 자체로 감사해야 했다. 해바라기 기름의 길은 시작점에 불과했다. 어떤 일이든 성공만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며칠 전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지난해 그 밭에서 해바라기 몇 포기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어제 비가 온 후에 네 그루를 뽑아서 샛터 꽃밭에 옮겨심어 놓았다. 꼬미 마을 희망 꽃이 다시 피어나기를….

“인간의 성공은 주님 손에 달려 있으니….”(집회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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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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