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르 베르토니 성인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부유한 법률가이자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가스파르는 예수회와 베로나에 있는 성 세바스티아노 학교에서 마리아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첫 영성체를 한 11살 때 사제가 되리라는 환시와 메시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1796년 신학교 입학 후 북이탈리아가 20년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에도 가스파르는 병원 사목을 위한 복음적 형제회에 참여해 상처 입고 병든 이들, 혁명군의 점령으로 쫓겨나거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1800년 사제로 수품된 가스파르는 성 바오로 본당에서 젊은이 사목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레지오 마리애의 형태를 빌려 젊은이들을 신앙적으로 양성하는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그러나 1807년 나폴레옹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가스파르는 더 나은 시기에 이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고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가스파르는 카노사의 막달레나 성녀가 성 요셉 수도원에 세운 공동체의 영적 지도를 맡았습니다. 당시 그는 영성 지도자로 활동했고, 잘 알려진 설교자였습니다. 1810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성 피르무스 성당으로 이동한 가스파르는 주교로부터 신학생들의 영적 지도를 부탁받고, 자신의 사제관에서 신학생들을 양성했습니다.
가스파르는 사제들이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도록 하고자 그들의 무조건적인 쇄신을 희망했습니다. 당시 비오 7세 교황이 나폴레옹에 의해 투옥되자 가스파르는 교황을 지원하는 전 유럽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됐습니다. 그에게 교황은 언제나 교회의 ‘으뜸’이자 ‘움직일 수 없는 반석’이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교회 재건이 시작되자 양 떼를 다시 모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던 가스파르는 교리교육과 설교에 투신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제시하며 교우들을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1816년 가스파르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흔 수도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학교를 세워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오상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참회의 공동생활을 했고, 주교의 요청에 따라 젊은이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고, 사제를 양성하며, 선교를 위한 설교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가스파르의 생애 마지막 20여 년은 오른쪽 다리의 발열과 계속되는 감염으로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도 침상에서 지속적으로 상담자요, 영성 지도자로 봉사했습니다. 1835년 선종 후 그가 설립한 수도회가 베로나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가스파르는 1975년 11월 1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1월 1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