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수많은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 박람회’와 같은 곳이다. 불교, 유교, 그리스도교와 같은 기성종교에서 신흥종교, 그리고 사회에 큰 물의를 빚는 유사종교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가 존재한다.
또한 뉴에이지 등 신영성 운동도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다. 이러한 다종교 사회에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는 자신의 신앙이 다른 종교와 어떻게 다른지, 자신은 왜 가톨릭 신자로 살고 있는지 공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의무가 아닌, 우리가 합리적으로 책임감 있게 믿으며 살기 위해서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박해받는 신자에게 보낸 베드로 서간의 이 당부 말씀은, 다양하게 신앙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새로운 박해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울림 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신앙으로 부여받은 희망에 관해 세상 사람들이 물을 때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 나의 신앙에 대해 물을 때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당신의 첫 회칙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자리함을 명확히 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말로 자기 삶의 근본적인 결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여기서 말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그분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며, 그 신앙이 오늘까지 전달되는 것도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분과의 ‘만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황님은 단순히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아닌, 그 만남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결과’까지 말씀하신다. 그 결과란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이란 단순히 교리를 믿거나 윤리적 계명을 지키는 것만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입으로 고백하는 것만도 아니다. 신앙은 예수님과 실제로 만나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 이전 삶과는 달리 그분께서 열어주시는 삶의 새로운 비전과 삶의 결정적인 방향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병이나 악령, 고통과 죽음 등으로 점철된 암울하고 절망적인 삶에 새로운 하늘이 열림을 경험했다. 자신들이 그저 왔다 사라지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의 사랑받는 소중한 자녀임을 경험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알게 해주신 그분은 그들에게 삶의 의미 자체였고, 그분을 따르는 삶은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회칙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아는가? 다만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닌, 실제로 그분을 만나 아는 앎에서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누가 물었을 때 나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분이시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나?
이 질문들에 곧바로 답을 할 수 없다고 해도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답이란 정해져 있지 않으며, 각자 자신의 삶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시며, 나의 삶에 어떤 의미이신가?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