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다 의심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느님의 존재, 내세의 삶, 육신의 부활 혹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부활, 승천 등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는가 하면,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이나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데, 내가 계속 믿는 것이 맞는가? 의심은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먼저 의심은 신앙에 늘 뒤따라오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신앙에서 의심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의심과의 공존이며, 의심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이 그러하다.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완벽한 믿음이 아닌, 종종 의심에 싸이며 길을 잃고 헤매는, 그렇지만 그러한 계기를 통해 성장해가는 믿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베드로 사도가 그러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뵈러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지게 되자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이 말씀은 믿음이 약한 베드로 사도에 대한 꾸중이지만, 믿음이란 늘 의심과의 싸움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말해주기도 한다. 믿음에 종종 찾아오는 의심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베드로 사도는 이후에도 수많은 의심의 순간을 맞았지만, 의심을 딛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었으며, 결국 예수님과 일치하는 순교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나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에 못지않게 우리의 믿음도 나약함과 한계로 각인된 믿음이며,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의심을 딛고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언젠가는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삶으로 마감할 수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정반대의 경우로 바오로 사도를 들 수 있다. 그는 믿음이 너무 과해서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일까지 동조하였다. 이는 과도한 확신이 믿음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러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그 만남은 그의 과도한 확신에 철퇴를 가했다. 그의 그릇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갖게 된 믿음은 자신의 나약함을 충분히 인식하는 겸손한 믿음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나약함을 자랑할 수 있었고, 나약함 안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확신을 전해줄 수 있었다.(2코린 12,5-10 참조)
믿음은 처음부터 의심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의심의 순간을 거치며 조금씩 확신에 다다른다. 따라서 의심이 없는 믿음보다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의심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게 대면하고 이를 딛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내와 용기를 청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의심은 나의 신앙에 더욱 확신하게 하는 디딤돌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 곧 신앙의 길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의심은, 믿음을 마비시키고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회의 섞인 의심과는 다르다. 이 믿음의 의심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나약함에 연결되어 있다. 나약함에서 오는 의심은 관계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관통해야 하는 순간들이다. 이 길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의심의 순간들을 관통하며 더욱 밝고 환희에 찬 믿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