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3)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2)
우리는 지금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찾는다. 점이나 사주를 보는 사람이 느는 현상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가지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종교나 신앙보다는 과학을 선호한다. 과학은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만, 종교나 신앙은 추상적인 것을 비현실적인 언어로 말하고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람들은 신앙에 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젊은 세대는 당차게 묻는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증명해달라고, 그럼 믿겠다고. 혹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째서 천재지변이나 전쟁과 같은 불의한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느냐고. 그런 물음 앞에서 신앙인은 대체로 당혹감을 느끼며, 또한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신앙에 대해 던지는 다양한 질문에 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은 신앙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들이다. 따라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찾기보다, 신앙의 본질적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신앙은 의심을 완벽히 배제한 것도 아니며, 수학 공식처럼 갖게 되는 확신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먼저 신앙은 끊임없는 의심의 극복이기에, 의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심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하는 의심으로, 믿음은 의심의 순간들을 관통하며 성장하기 마련이다.
다른 한편, 신앙은 수학 공식처럼 신 존재 증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확신이 아니다. 따라서 과도한 확신은 광신주의(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빠질 수 있어 늘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갖는 신앙의 확신은 완성된 것이 아니며, 새로운 문제 앞에서 늘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께서 걸었던 신앙의 여정처럼 말이다.
이러한 신앙의 역설은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믿음의 어려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우리에게 던지는 자녀나 배우자의 질문이나 의심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가령 자녀들이 커가면서 신앙에 대해 의심을 갖고 질문을 하거나, 신앙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때, 그것을 반항이나 방황으로 보다는, 신앙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성장의 순간들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신앙의 확신은 한순간에 가질 수 없는, 의심을 동반하기도 하는, 삶의 긴 여정을 거치며 획득되는 것이기에, 자녀에게 즉각적인 답을 주려고 애쓰기보다, 자녀의 생각과 감정을 공감해주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계속 가다 보면 어느새 신앙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신뢰 관계다. 신앙은 그러한 물음에 늘 열려 있다는 것, 그리고 의심과 갈등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기회를 주고 대화하며 공감해준다면, 자녀는 그 자체로 부모와 교회, 그리고 신앙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신앙에는 그런 솔직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자녀나 배우자뿐 아니라 사람들이 갖는 믿음의 어려움, 의심 등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하고 그들이 걷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중요하다. 당장 확신을 갖지 못할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도록 동반해주며 함께 걸을 때, 우리의 신앙도 함께 성장할 것이다.
※ ‘금쪽같은 내신앙’ 코너를 통해 신앙 관련 상담 및 고민을 문의하실 분들은 메일(pbcpeace12@gmail.com)로 내용 보내주시면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