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로마 제국의 관리였던 부친과 모니카 성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는데, 370년에는 법률가가 될 꿈을 안고서 카르타고의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낳았습니다.
384년 밀라노의 수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는 신플라톤 철학과 암브로시오 성인의 설교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암브로시오의 강의를 통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은유적 또는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명예, 재산, 결혼 등과 관련해 내적 갈등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정원을 산책하던 아우구스티노는 “집어서 읽어라”하고 반복해서 외치는 신비로운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이에 아우구스티노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그의 친구 알리피우스 성인과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에 암브로시오의 지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일종의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다가 39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5년 후 히포의 주교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35여 년을 참된 사목자로 헌신했습니다. 사목자의 권위를 행사하되 하느님 백성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사용했고, 대성당의 성직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으며, 엄격한 규율 아래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틈나는 대로 글을 쓰기도 했는데, 113종의 책과 논문, 200여 통의 편지, 500회의 설교 등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자신의 개종 과정을 기록한 자서전적 저서인 「고백록」과 호교론적 저서인 「신국론」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은총론에 대해서도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흔히 아우구스티노를 ‘은총론의 박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교회 학자이며 뛰어난 영성가로 불립니다. 주교가 된 후에도 주교관 내에 성직자 수도원을 세워 공동생활을 이어갔을 정도입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수도 규칙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 미술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대개 연구에 몰두하는 주교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15세기 이후에는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든 어린아이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성인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중년의 아우구스티노는 심오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몰두하며 바닷가를 거닐던 중 한 어린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모래톱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놓고 조개 껍데기로 부지런히 바닷물을 퍼 나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다 퍼 담을 것”이라는 아이에게 아우구스티노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그럼, 아저씨의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어요?”하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17세기 이후에는 불타거나 화살에 의해 관통된 심장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그려지는데, 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종교적 열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